1950년 12월 7일 오전 9시 30분, 북한 동북부 산속의 작은 마을 고토리(Koto-ri) 위로 미 공군 C-119 수송기들이 다가왔습니다. 낙하산에 매달려 방어선 안으로 떨어진 것은 탄약 상자가 아니었습니다. 한 조각에 2,500파운드나 되는 강철 다리였습니다.
고토리 남쪽의 다리가 끊겨 있었습니다. 바다로 내려가는 길은 그 하나뿐이었고, 길 하나에 매달린 부대에게 끊긴 다리는 곧 끊긴 길이었습니다.
장진호 전투(Battle of Chosin Reservoir)는 1950년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북한 동북부의 장진호 둘레에서 벌어졌습니다. 미 제1해병사단과 육군·국군 부대는 훨씬 많은 중국군에 둘러싸였고, 산길 하나를 따라 싸우며 바다 쪽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들은 왜 그 높은 산속까지 올라갔고, 추위와 하늘과 공중에서 떨어뜨린 다리는 이 철수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요?
크리스마스 전에 끝난다던 전쟁
1950년 9월 인천 상륙이 성공한 뒤, 한국전쟁은 유엔군의 승리로 곧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그해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이 끝나고 북한의 공산 체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중국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10월 19일 중국군은 몰래 만주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왔습니다. 엿새 뒤 국군 제1군단이 장진호 남쪽에서 처음 중국군과 맞닥뜨렸고, 11월 2일에는 미 제1해병사단이 수동(Sudong)에서 중국군 한 사단과 싸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NHHC)의 개요는 11월 중순까지 북한에 들어온 중국군을 약 10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살아남은 북한군 부대까지 더하면 유엔군 앞의 적은 14만 2,000~16만 7,000명이었습니다.
유엔군 사령부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장진호전투」 항목은 맥아더가 중국군의 참전 목적과 병력 규모를 11월 초까지도 가볍게 봤다고 서술합니다. 맥아더가 선제공격을 결심하자, 동부를 맡은 미 제10군단의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은 국경선을 목표로 북진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제10군단에는 미 육군 제3·제7보병사단, 미 제1해병사단, 영국 해병 코만도, 국군 부대가 있었습니다. 군단은 함흥에서 장진호 서쪽으로 아주 좁고 험한 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이 길은 군단의 주 보급로(main supply route, MSR)였고 적의 공격에 매우 약했습니다. 탄약과 식량 같은 군수(logistics) 물자는 이 길로 올라왔습니다.
제1해병사단장 올리버 스미스(Oliver P. Smith) 소장은 북진 내내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는 단계마다 탄약과 보급품을 쌓았고, 길을 따라 보급 지점과 엉성한 활주로를 마련했으며, 주 보급로를 손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알몬드는 이런 조치를 좋게 보지 않았고, 두 지휘관 사이에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장진호는 항구 도시 흥남에서 내륙으로 약 50마일, 높이 3,400피트에 있습니다. 남북으로 약 16마일 뻗어 있고, 서쪽으로 약 8마일의 갈래가 나 있습니다. 그 서쪽 갈래 끝 가까이에 유담리(Yudam-ni)가 있습니다.
유담리는 호수 남쪽 끝의 하갈우리(Hagaru-ri)와 좁고 구불구불한 자갈길로 이어졌고, 그 길은 대개 한 차선뿐이었습니다. 해병대는 하갈우리에 전진 기지와 사단 지휘소, 엉성한 활주로를 두었습니다. 길 거의 전부를 내려다보는 높은 곳은 중국군이 쥐고 있었습니다.
11월 27일 밤
싸움보다 날씨가 먼저 왔습니다. 11월 25일, 한 세기 만에 가장 심한 시베리아 눈보라가 한반도와 바다를 휩쓸어 모든 작전이 멈췄습니다. 추위는 중국군만큼 무서운 적이었습니다.
당시 기온은 해병대 공식 전사에 화씨(°F)로 남아 있습니다. 11월 26일 밤 기온이 갑자기 0°F로 떨어졌고, 27일 오후 6시 30분 유담리는 −20°F였습니다. 섭씨로 바꾸면 약 −18 °C와 약 −29 °C, 영하 30도에 가까운 추위입니다. H-Gram이라는 NHHC 소장의 역사 글에는 밤 기온이 자주 "영하 25도"까지 내려갔다고만 적혀 있고 단위는 없습니다.
해병 부대는 11월 25일까지 장진호 서쪽의 유담리에 닿았고, 27일 더 서쪽으로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10시, 중국군이 전장 신호로 쓰던 나팔과 징 소리와 함께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쑹스룬(Song Shi-lun) 장군이 이끈 제9병단이 유담리 둘레의 해병대와 호수 서쪽 길을 쳤고, 같은 때 호수 동쪽의 미 육군 진지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 공세에 나선 병력은 자료마다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NHHC 개요는 "거의 12만 명", H-Gram은 "12만 명"이라고 쓰고, 한국 백과는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규모"로 적습니다. 백과에 따르면 제9병단 아래에는 제20·제27·제26군단이 있었습니다.
호수 서쪽과 동쪽의 두 길은 장진호 남쪽 끝에서 하나로 모였습니다. 바다로 돌아가는 길은 그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날 밤 이후 해병대는 네 무리로 나뉘어 서로 끊겼습니다. 해병 제5·제7연대는 유담리에서 중국군 두 사단에 둘러싸였고, 남쪽의 하갈우리와 고토리에 있던 해병대도 갇혔습니다. 호수 동쪽, 하갈우리 북쪽에서는 미 육군 제31연대전투단이 고립됐습니다. 흔히 페이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Faith)라고 불린 부대입니다.
이들을 서로, 그리고 75마일 떨어진 바다와 이어 준 것은 겨우 지나갈 만한 산길 하나였습니다. 그 길을 내려다보는 높은 곳에는 중국군이 있었습니다.
길 하나로 바다까지
11월 30일 알몬드는 하갈우리에서 작전 회의를 열어 북진 계획을 다시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 기지로 옮기라고 명령했습니다. 이튿날인 12월 1일, 미 합동참모본부도 맥아더에게 제10군단을 철수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12월 1일 해병 제5·제7연대가 유담리를 떠나 하갈우리 쪽으로 싸우며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근접 항공 지원(close air support)과 포병에 기대 길가 높은 곳의 중국군을 누르며 남쪽으로 움직였습니다. 해병대의 사상자는 1마일에 약 100명꼴로 컸고, 중국군의 사상자는 그보다 더 많았습니다.
12월 4일 두 연대는 부대의 짜임을 잃지 않은 채 하갈우리 방어선에 들어왔습니다. 알몬드는 스미스에게 장비를 버리고 되도록 많은 병력을 하늘로 빼내도 된다고 허락했습니다. 해병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증원 병력을 비행기로 들여왔습니다. 하늘로 나간 것은 부상자뿐이었습니다.
호수 동쪽의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는 해병사단의 지휘 아래 들어간 뒤 하갈우리로 빠져나오려 했습니다. 부대는 하갈우리를 4마일 앞두고 거듭된 대규모 공격에 무너졌습니다. 지휘관 돈 페이스(Don Faith) 중령을 포함해 장교와 부사관이 거의 모두 숨졌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거의 모두 다쳤습니다.
12월 6일, 해병 제7연대를 앞세워 하갈우리에서 남쪽으로 돌파가 시작됐습니다. 해병대와 육군, 국군 부대가 물러나는 좁은 길의 옆구리에서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행렬 사이사이에는 피란민 수백 명이 섞여 있었습니다.
12월 7일 사단은 모든 병력을 고토리로 모았습니다. 다음 구간인 고토리~진흥리(Chinhung-ni)는 벼랑길이 아주 좁고 다리가 끊겨, 철수에서 아마 가장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12월 8일 이 구간에서는 시야가 0이고 북극에 가까운 추위가 이어져 항공기가 한 대도 뜨지 못했습니다. 같은 날씨가 쫓아오던 중국군의 발도 묶었고, 그 가운데 많은 병사가 얼어 죽었습니다.
진흥리를 지난 제1해병사단은 12월 11일 함흥 지역에 모두 들어왔습니다. 같은 날 사단은 흥남에 닿았고, 제90기동부대(Task Force 90)의 배로 철수가 시작됐습니다.
추위, 하늘, 그리고 떨어뜨린 다리
1950년 한국의 겨울은 그때까지의 기상 기록에서 손꼽히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영하의 기온에서는 부상자를 치료하기가 훨씬 어려웠고, 무기가 작동하지 않았으며, 바퀴 달린 차량은 거의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해병대 공식 전사에는 한 장교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카빈 소총이 추위에 격발되지 않은 장면도 나옵니다.
호수도 얼어붙었습니다. 해군 초계 비행대는 비행정을 장진호에 내려 보급품을 나르고 부상자를 실어 내려 했지만, 호수가 단단히 얼어 계획을 접었습니다.
하늘에서는 항공모함이 큰 몫을 맡았습니다. 제77기동부대 항공모함의 근접 항공 지원은 11월 28일 시작됐습니다. 처음 장진호 둘레 작전에 쓸 수 있던 미 해군 정규 항공모함은 필리핀 시(Philippine Sea)와 레이테(Leyte) 두 척뿐이었습니다. 12월 5일 프린스턴(Princeton)이 도착했고, 12월 23일에는 밸리 포지(Valley Forge)가 더해졌습니다.
해군 항모 항공단(carrier air wing) 말고도 해병대 비행대가 호위 항공모함 바둥 스트레이트(Badoeng Strait)와 시실리(Sicily)에서 떴습니다. 함흥 연포와 원산의 비행장도 쓰였습니다. 가장 가까운 미 공군 비행대는 200마일 남쪽에 있었고, 항공모함은 해안 가까이 머물렀습니다. 이 가까움이 높은 작전 속도를 이어 간 큰 요인이었습니다.
바다 위 날씨도 혹독했습니다. 그다음 한 주 동안 항공모함은 전투에서 겪은 가장 나쁜 축에 드는 날씨 속에서 공격을 이어 갔고, 사고로 잃은 것이 적에게 잃은 것보다 많았습니다. 바다에 내린 조종사는 방수복을 입고도 찬 바다에서 몇 분밖에 버티지 못했습니다.
12월 4일 해병대를 지원하던 한 임무에서, 해군 조종사 자격을 얻은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제시 브라운(Jesse Brown) 소위의 코르세어 전투기가 아마도 지상 사격에 맞아 산속에 불시착했습니다. 브라운은 살아 있었지만 불붙은 기체에 몸이 끼었습니다.
윙맨 토머스 허드너(Thomas Hudner) 중위는 그를 꺼내려고 일부러 바퀴를 내리지 않은 채 근처에 내렸고, 해병 헬리콥터 조종사 찰스 워드(Charles Ward) 중위도 위험을 무릅쓰고 구조를 시도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브라운을 기체에서 꺼내지 못했고, 브라운은 부상과 저체온증으로 숨졌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데이지에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전해 줘"였습니다. 데이지는 그의 아내였습니다.
1951년 4월 13일 허드너는 트루먼 대통령이 연 식에서 명예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백악관에서 데이지를 만났고, 그녀가 201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연락을 이어 갔습니다.
땅 위의 활주로는 길만큼 중요했습니다. 반쯤 지은 하갈우리 활주로가 12월 1일 "운용 가능"으로 선언되자, 미 공군 C-47 수송기 네 대가 보급품을 싣고 내렸습니다. 12월 2일에는 C-47과 R4D 수송기가 부상자 914명을, 3일에는 700명 넘게를 실어 냈습니다.
해병대 집계로 12월 첫 닷새 동안 하갈우리에서 하늘로 후송된 사람은 4,312명이었습니다. 해병대원 3,150명, 육군 1,137명, 영국 해병 25명입니다. 제10군단은 같은 기간을 4,207명으로 추산했습니다. 가장 어려운 때 적에게 갈라진 부대들 사이를 오간 것은 관측기(OY)와 헬리콥터뿐이었습니다.
남은 문제는 고토리 남쪽의 끊긴 다리였습니다. 골짜기나 강처럼 다리를 놓아야 넘을 수 있는 장애물 너머로 부대를 옮기는 일을 간극 건너기(gap crossing)라고 합니다. 공병 지휘관 파트리지(Partridge) 중령은 M-2 강철 트레드웨이 다리 조각을 공중에서 떨어뜨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망가질 때를 생각해 100% 여유를 두고 여덟 조각을 청했습니다.
12월 7일 오전 9시 30분, 미 공군 C-119 수송기들이 무게 2,500파운드의 조각 세 개를 고토리 방어선 안에 떨어뜨렸습니다. 나머지 다섯 조각은 정오까지 떨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중국군 쪽에 떨어졌고 하나는 망가졌습니다.
다리는 12월 9일, 공사를 시작한 지 세 시간 만인 오후 3시 30분 무렵 제자리에 놓였습니다. 곧 흙 나르는 장비를 끌던 트랙터가 가운데 합판을 부숴, 바퀴 달린 차량은 지나갈 수 없게 됐습니다. 불도저를 능숙하게 다뤄 트레드웨이 간격을 다시 맞춘 뒤, 첫 지프가 양쪽 가장자리에 타이어를 긁으며 건넜습니다.
숫자는 자료마다 다르다
전투가 언제 끝났는지부터 자료가 다릅니다. 한국 백과는 11월 27일부터 함흥에 닿은 12월 11일까지의 2주로 봅니다. NHHC 개요는 흥남 철수가 끝난 12월 24일까지를 "전투, 싸우며 물러남, 철수"로 묶습니다. 해병대 공식 전사의 손실 집계는 10월 26일부터 12월 15일까지를 셉니다.
중국군 병력도 그렇습니다. 앞의 12만 명 말고도, H-Gram에 붙은 해설 글(H-056-1)은 산맥 동쪽으로 들어와 제10군단과 맞선 중국군을 15만 명으로 적습니다.
1957년 해병대 공식 전사의 머리말은 해병대가 78마일 산길에서 "중국군 열두 개 사단"을 뚫고 나왔다고 쓰고, 책 본문이 옮긴 해병대 위원회의 연구는 "적어도 일곱 개 사단"이라고 합니다. 유담리에서 바다까지의 거리도 H-Gram은 75마일, 머리말은 78마일입니다.
해병대 손실은 해군장관에게 보고된 숫자가 남아 있습니다. 1950년 10월 26일~12월 15일 동북부 한국에서 해병대의 전투 손실은 4,418명이었습니다. 전사 604명, 부상 뒤 사망 114명, 실종 192명, 부상 3,508명입니다.
비전투 손실은 7,313명으로 더 많았습니다. 대부분 가벼운 동상과 소화 불량이어서 곧 부대로 돌아갔고, 스미스는 그 3분의 1이 작전 도중에 복귀했다고 추산했습니다.
호수 동쪽 육군 부대의 손실은 두 숫자로 나옵니다. H-056-1의 본문은 부대의 75%를 잃었다고 쓰고, 글 끝에서는 31연대전투단이 90% 넘게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됐다고 씁니다.
중국군의 손실은 더 불확실합니다. 해병대 공식 전사는 같은 기간 적 손실을 3만 7,500명으로 추정했습니다. 해병대 지상군에 의한 전사 1만 5,000명과 부상 7,500명, 해병 항공에 의한 전사 1만 명과 부상 5,000명을 더한 값입니다. 책은 바로 이어 이런 숫자는 대개 크게 믿을 수 없다고 덧붙입니다.
추위는 중국군에게도 적이었습니다. 공식 전사가 옮긴 중국군 노획 문서를 보면 제26군의 90% 넘게가 동상을 입었고, 제27군은 네 사단 병력에서 비전투 손실만 1만 명을 호소했습니다.
문서는 병사들에게 먹을 것과 지낼 집이 모자랐고, 혹독한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제20군에서는 상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100명이 파상풍으로 숨졌습니다.
명예 훈장의 수도 어디까지 세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해병대는 14개를 받았고 그 가운데 7개는 사후 수여였습니다. 해병사단의 지휘 아래 있던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에서도 페이스 중령을 포함한 2명이 사후에 받았습니다. NHHC의 허드너 소개 쪽은 장진호 전투에서 나온 명예 훈장을 17개로 적습니다.
남긴 것
장진호에서 내려온 부대는 흥남에서 배에 올랐습니다. 철수는 크리스마스이브까지 이어졌고, 미 제7보병사단이 마지막으로 배에 탔습니다.
약 2주 동안 제90기동부대의 배 200척 가까이가 군인 10만 5,000명, 한국 민간인 9만 1,000명, 전차와 차량 1만 7,500대, 보급품 35만 톤을 남쪽으로 옮겼습니다. 그래도 흥남에는 적어도 9만 명의 피란민이 남겨졌습니다.
바다로 빼낸 까닭과 그 평가는 갈립니다. H-Gram 본문은 서부 전선이 무너지자 맥아더가 동부의 유엔군을 흥남에서 배로 빼내 한반도 반대편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고 설명합니다. 서울이 두 번째로 공산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였습니다. 이 결정은 여러 해 동안 논쟁거리였고, H-Gram을 쓴 NHHC 소장은 함흥·흥남을 아마 지킬 수 있었을 것이며 서울은 어차피 1월에 함락됐다고 봅니다.
중국군 쪽의 결과에도 해석이 있습니다. 백과에 따르면 중국군은 장진호 부근에서 전투 손실뿐 아니라 비전투 손실도 크게 입어 더 이상 작전을 이어 갈 수 없었고, 제9병단 지휘부는 3개월에 걸쳐 부대를 재편성하려고 후방으로 물러났습니다.
백과의 집필자는 이 전투가 제9병단이 서부 전선의 제13병단을 도울 힘을 없애, 서부의 미 제8군이 위기를 넘기는 데 한몫했다고 봅니다.
기억하는 방식도 남았습니다.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 전투로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고, 1991년 취역한 미 해군 순양함 초신(USS Chosin)은 그곳에서 싸운 이들을 기려 이름을 얻었습니다.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는 처음 표창에서 빠졌습니다. 그 뒤 중국군 지휘관들이 이 부대가 장진호에서 자신들의 공격을 꺾었다고 적은 중국 쪽 문서가 나왔고, 2001년 미 해군은 이 부대의 표창을 승인했습니다.
추위가 바꾼 장비도 있습니다. 장진호의 동상 환자를 연구한 결과, 한국전쟁의 그 뒤 두 겨울 동안 방한화(thermal boot)가 동상을 막는 수단으로 채택됐습니다.
숫자와 표창 뒤에는 그 겨울 산길에 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병대원과 육군·국군 병사, 영국 해병, 행렬에 섞인 피란민, 그리고 같은 추위 속에서 얼어 죽은 중국군 병사들입니다.
다음에 읽을 글
- 흥남 철수: 배 위에 오른 피란민: 장진호에서 내려온 부대와 피란민이 흥남에서 배에 오른 2주를 봅니다.
- 인천상륙작전: 조수 간만의 차와 크로마이트 작전: 북진의 출발점이 된 1950년 9월의 상륙입니다.
- 교량전차와 군용 가교: 전차도 다리가 필요하다: 끊긴 길을 잇는 군용 다리가 무엇인지 봅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보급, 이동, 정비가 군대를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지 봅니다.
- 항공모함: 배 한 척이 공항이 되려면: 바다 위에서 항공기를 띄우고 받는 배가 어떻게 일하는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