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1월 14일, 베트남 중부 고원의 플레이메(Plei Me)에서 UH-1 '휴이(Huey)' 헬기 16대가 병사들을 태우고 떠올랐습니다. 가는 곳은 캄보디아 국경 가까운 이아드랑(Ia Drang) 계곡의 빈터, '엑스레이(X-Ray)'라는 이름이 붙은 착륙장이었습니다. 그 헬기에 탔던 한 병사는 50년 뒤 기념식에서 그날이 "그냥 또 하루"였다고 돌아봤습니다.
그 '또 하루'는 사흘로 늘어났고, 이어진 앨버니(Albany) 착륙장의 싸움까지 합쳐 미 육군이 베트남전의 첫 대규모 전투로 꼽는 싸움이 되었습니다. 병사들을 실어 간 부대도 보통의 보병 사단이 아니었습니다. 지상 차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항공기를 4.5배로 늘린, 헬기로 싸우도록 짠 첫 사단이었습니다.
이 사단은 어떻게 생겼고, 이아드랑에서 헬기는 무엇을 실어 나르고 무엇을 하지 못했을까요? 공개된 미국 정부 기록을 따라 차례로 살펴봅니다.
헬기로 싸우는 사단이 생기기까지
시작은 1960년의 한 위원회였습니다. 고든 로저스(Gordon B. Rogers) 중장이 이끈 위원회는 육군 항공, 그 가운데서도 헬기를 끌어올리는 일을 맡았습니다. 위원회는 UH-1을 육군의 주력 헬기로 삼고 쌍발 화물 헬기 CH-47 '치누크(Chinook)'를 사들이자고 권고했습니다.
1962년에는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국방장관이 지상군의 전술 기동을 다시 살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초점은 공중기동(airmobility)이었습니다. 헬기로 병력을 원하는 곳에 실어 나르고, 헬기로 근접 항공 지원까지 하자는 생각입니다. 맥나마라는 육군의 첫 항공 국장이던 해밀턴 하우즈(Hamilton H. Howze) 중장에게 위원회를 맡겼고, 이 '하우즈 위원회'는 그해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브래그에서 열렸습니다.
위원회가 그린 그림은 헬기에 태운 병력을 전장 어디에나 내려 적과 빠르게 맞붙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962년 8월 위원회는 의무 후송 소대까지 갖춘 새 공중기동 사단을 만들자고 권고했습니다. 국방부는 권고 전체에 대한 결정을 미뤘습니다. 대신 헬기 대대를 가진 공중강습 사단 하나를 만들어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1963년 1월 7일 육군 작전 참모부장이 실험 사단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2월에 조지아주 포트베닝에서 제11공중강습사단(시험)이 꾸려졌습니다. 사단장은 해리 킨나드(Harry W. O. Kinnard) 준장이었습니다. 그해 9~10월 조지아주 포트스튜어트의 야외 훈련 'Air Assault I'은 공중강습 대대와 중대를 지휘하는 능력, 그리고 의무 후송 소대가 부딪힐 문제를 시험했습니다.
사단은 1964년 말까지 공중기동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1965년 7월 1일에는 실전 사단이 되면서 이름을 '제1기병사단(공중기동)'으로 바꿨습니다. 시험 사단의 부대에 포트베닝 제2보병사단의 자원을 합치고, 1950년부터 한국에 있던 제1기병사단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보통 사단과 무엇이 달랐나
새 사단의 병력은 약 16,000명으로 보통 사단과 같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탈것입니다. 항공기는 보통 사단의 4.5배였고 지상 차량은 절반이었으며, 조종사가 1,000명 가까이, 항공 정비병이 2,000명이었습니다.
보병은 8개 대대였다가 베트남에서 9개로 늘었고, 이들을 세 여단으로 묶었습니다. 병력을 실어 나르는 강습 헬기 대대가 둘 있었습니다. 대대마다 무장하지 않은 수송 헬기 60대를 20대씩 세 중대로 나눠 두었고, 따로 UH-1B 무장 헬기(gunship) 12대의 중대를 하나씩 붙였습니다.
포병도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항공 로켓 포대의 UH-1B 36대는 저마다 접이식 날개 로켓 72발을 실었습니다. 땅 위의 포도 헬기로 옮겨 다녔습니다. 베트남에서는 경포와 중포를 헬기로 들어 한 화력 기지에서 다른 기지로 필요할 때 꽤 빨리 옮길 수 있었습니다.
헬기 12대로 된 의무 후송 소대도 처음부터 사단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의 한가운데에는 UH-1 휴이가 있었습니다. 휴이 한 기종이 병력 수송, 무장 헬기, 의무 후송, 화물 수송을 다 맡았고, 더 무거운 짐은 CH-47 치누크와 CH-54 같은 수송 헬기가 날랐습니다.
왜 하필 헬기였을까요? 남베트남은 도로망이 넓지 않았고, 있는 길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NVA)의 공격을 자주 받았습니다. 미 육군의 역사 잡지 Army History에 1994년 실린 허버트 르포어(Herbert P. Lepore)의 글은 미군 지상군에 유리했던 세 가지로 전술 기동, 화력, 군수(logistics) 지원을 꼽고 셋 모두를 헬기가 해냈다고 정리합니다.
플레이메에서 이아드랑 계곡으로
한 참전 군인은 사단이 베트남에 간다는 소문이 1965년 7월 28일 존슨 대통령의 발표로 사실이 됐다고 기억합니다. 사단은 7월에 명령을 받아 8월에 떠났고 9월에 남베트남에 닿았습니다. 9월 초에는 중부 고원의 안케(An Khe) 평원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10월 초, 북베트남군 제32·33연대가 캄보디아 국경과 플레이메 사이의 플레이쿠(Pleiku)성 서부로 들어왔습니다. 플레이메는 플레이쿠에서 남쪽으로 43 km 떨어진 특수부대 기지였고, 제66연대도 곧 올 참이었습니다. 10월 20일 제33연대가 플레이메를 지키던 남베트남 민간 비정규 방위대(CIDG) 네 중대를 공격했습니다.
10월 23일 남베트남군 기갑 구원 부대가 제1기병사단 포병의 엄호를 받으며 플레이쿠를 떠났습니다. 구원 부대는 24일 오후 5시 50분 매복을 당했지만 뚫고 나가 이튿날 포위된 기지에 닿았습니다.
10월 27일 웨스트모어랜드(Westmoreland) 장군은 사단장 킨나드 소장에게 플레이쿠성 서부에서 수색·섬멸 작전을 펴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단의 임무가 처음으로 제한 없는 공세가 된 것입니다. 11월 싸움에 앞서 사단의 정찰 부대인 제9기병연대 1대대가 이 지역을 먼저 살폈습니다.
엑스레이 착륙장의 사흘
11월 14일, 브루스 크랜들(Bruce P. Crandall) 소령이 이끄는 229강습헬기대대 A중대의 헬기 16대가 플레이메에서 엑스레이로 병력을 실어 날랐습니다. 헬기에 탄 것은 해럴드 무어(Harold G. Moore) 중령의 제7기병연대 1대대였고, 가장 먼저 내린 것은 1대대 B중대였습니다.
착륙장이 내려다보이는 산에는 새로 도착한 북베트남군 제66연대와 제33연대의 남은 병력이 있었습니다. 이른 오후에는 북베트남군 수백 명이 착륙장 둘레의 1대대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헬기 8대가 들어간 다섯째이자 마지막 병력 수송 때 착륙장은 소총과 자동화기, 박격포와 로켓의 사격을 받았습니다. 내리려고 기다리던 나머지 헬기에는 기지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날 저녁 제7기병연대 2대대 B중대가 지원하러 들어갔고, 15일 아침 다시 공격이 왔습니다. 16일에는 제5기병연대 2대대와 제7기병연대 2대대의 나머지가 들어와 착륙장을 맡았습니다. 처음 내린 1대대는 2대대 B중대와 함께 홀러웨이 기지(Camp Holloway)로 돌아갔습니다.
사흘 동안의 피해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2015년 army.mil 기사에는 미군 80명 전사, 124명 부상으로 나옵니다.
같은 army.mil의 크랜들 명예 훈장 쪽에는 무어의 대대와 함께 이 싸움을 겪은 UPI 기자 조 갤러웨이(Joe Galloway)의 말로 보병 79명과 공군 조종사 1명 전사, 130명 부상이 실려 있습니다. 북베트남군 사망자는 자료에 따라 600~1,200명으로 추정됩니다. 숫자를 한 중대의 크기로 줄여 보면 무게가 달라집니다. 1대대 B중대를 이끈 존 헤런(John D. Herren)의 중대는 처음 이틀 동안 122명 가운데 46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탄약은 들어가고 부상자는 나오고
다섯째 수송을 마치고 기지로 돌아온 크랜들은 1대대로 가는 의무 후송이 모두 끊긴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설명으로는 당시 의무 후송 조종사들은 착륙장이 5분 동안 'green'이 되기 전에는 내릴 수 없었습니다. 'green'은 착륙장이 쉼 없이 공격받지 않는 상태를 가리켰습니다.
크랜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직접 부상자를 실어 오기로 했고, 자원자를 찾자 에드 프리먼(Ed Freeman) 대위가 나섰습니다. 크랜들이 몬 헬기는 무장하지 않은 헬기였습니다.
크랜들의 명예 훈장 사유서에 적힌 착륙은 14번입니다. 착륙장이 닫힌 뒤 들어간 탄약·보급품 헬기 31번 가운데 28번을 크랜들의 비행대가 맡았고, 후송된 부상자 약 78명 가운데 70명을 이들이 실어 냈습니다. army.mil의 같은 쪽 다른 문단에는 "21번 더" 날았다는 숫자도 있어, 횟수는 자료 안에서도 하나로 맞지 않습니다.
2007년 2월 26일 백악관에서 크랜들에게 명예 훈장을 주며 부시 대통령은 그가 그날 헬기 세 대를 바꿔 탔고 그 가운데 두 대는 더 날 수 없을 만큼 부서졌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려앉았을 때 크랜들과 프리먼은 14시간 넘게 하늘에 있었습니다.
2001년 백악관 연설에 따르면 프리먼은 그날의 일로 처음에 수훈 비행 십자장(Distinguished Flying Cross)을 받았고, 2001년 7월 16일 명예 훈장을 받았습니다. army.mil의 크랜들 쪽에는 두 사람 모두 수훈 십자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받았다고 적혀 있어 기록이 서로 다릅니다.
땅 위의 병사들에게 이 비행은 보급 이상의 뜻이 있었습니다. 헤런은 다친 동료가 싸움이 멎기를 기다리지 않고 후송된다는 것을 이 비행이 보여 줬다고 돌아봤습니다.
의무 병과의 기록은 조금 다른 장면을 보여 줍니다. 미 육군 의무 병과 역사 기관의 Dust Off에는 대대 군의관이 의무병 4명과 의약품을 들고 사단 의무 후송 소대의 헬기로 들어가 바로 치료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날 밤까지 의무 후송 소대와 돌아온 무장 헬기가 부상자를 모두 실어 냈다는 것이 이 책의 서술입니다. 두 기록은 누가 부상자를 실어 냈는지를 서로 다르게 강조합니다.
후송의 짐은 무거웠습니다. 이아드랑에는 한 번에 평균 약 3,000명의 증강 여단이 투입되었고, 사상자는 하루 평균 70~80명, 가장 많은 날에는 280명이었습니다.
제15의무대대가 앞쪽에 둘 수 있는 헬기는 세 대뿐이었습니다. 덜 위중한 부상자는 병력 수송 헬기가 착륙장에서 실어 내 소대의 짐을 덜었습니다.
숲도 문제였습니다. 무어는 전투 후 보고에 적의 사격과 높이 100피트(약 30 m)의 빽빽한 나무 때문에 다친 자리에서 바로 후송할 수 없었다고 썼습니다. 병사들은 부상자를 하나뿐인 안전한 착륙장까지 옮겨야 했습니다.
앨버니, 그리고 남은 물음
11월 17일 아침, 남은 부대가 엑스레이를 떠났습니다. 제7기병연대 2대대는 약 2마일(약 3 km)을 걸어 가까운 앨버니 착륙장으로 향했고, 그 길에서 매복을 당했습니다. 싸움은 18일 새벽까지 18시간 이어졌습니다.
2015년 army.mil 기사에 실린 갤러웨이의 말로는 여섯 시간 사이에 미군 155명쯤이 죽고 130명이 다쳤습니다. army.mil 크랜들 쪽에 실린 그의 다른 말에는 앨버니의 사망자가 154명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는 두 싸움이 1965년 10월 23일부터 11월 26일까지 34일 동안 이어진 플레이쿠 작전의 일부였고, 앞뒤의 작은 싸움까지 합치면 미군 305명이 죽었다고 정리했습니다.
워싱턴은 이 싸움을 어떻게 읽었을까요? 11월 30일 맥나마라는 존슨 대통령에게 보낸 메모에서 최근의 극적인 변화가 군사 쪽에 있다고 썼습니다. 북쪽에서의 침투가 늘었고, 공산군이 대규모 교전에서도 버티고 싸우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1월 초의 '이아드랑강 작전'을 그 예로 들었고, 이런 증강에 맞서기에는 지금 생각하는 1단계 병력으로 모자란다고 판단했습니다.
그사이 1년 동안 남쪽으로 들어온 북베트남 정규군은 9개 연대였습니다. 보병 대대로 치면 27개였습니다.
공중기동에 대한 평가도 엇갈렸습니다. 르포어가 정리한 당시의 비판은 넷입니다. 지휘관이 헬기를 하늘의 지휘소로 쓴다는 것, 지상에서 움직여 적을 붙잡으려는 능력이나 의지를 줄인다는 것, 헬기 소리가 미군이 온다는 것을 미리 알려 준다는 것, 그리고 지상 사격을 견디기에는 무장이 가볍다는 것입니다.
반론도 있었습니다. 땅이 험하고 길이 모자란 곳에서는 지키는 쪽이 유리했고, 기갑과 포병의 지원을 받아도 땅으로 움직이는 일은 위험하고 오래 걸렸습니다. 르포어는 공격에 헬기를 쓰면서 이 유리함이 크게 줄었다고 봤습니다.
헬기 전쟁은 그 뒤로 더 커졌습니다. 1966년 5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베트남에서는 제1항공여단이 육군 항공기를 묶어 관리했고, 이 여단이 맡은 사단 밖 항공 자산은 많을 때 항공기 4,000대와 병력 24,000명에 이르렀습니다. 1967년에는 AH-1 코브라 무장 헬기가 처음 들어왔습니다.
잃은 것도 많았습니다. 1971년 람손 719 작전에서 육군은 헬기 약 100대를 잃었고, 대부분은 소련제 37 mm 대공포에 맞았습니다.
르포어는 베트남에서의 헬기가 미국의 전술 교리를 영원히 바꿨다고 평가하고, 이 전쟁에서 의무 후송 헬기 승무원이 미군 부상자 약 390,000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숫자를 듭니다. 이아드랑은 그 긴 이야기의 앞머리에 있습니다. 헬기로 움직이도록 짠 사단이 실제 전장에서 할 수 있었던 일과 모자랐던 것이 사흘과 하룻밤 사이에 함께 드러났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헬리콥터 로터와 동축반전로터: 휴이 같은 헬기가 어떻게 떠서 방향을 바꾸는지 다룹니다.
- 방공포: 미사일 시대에도 포가 남아 있는 이유: 대공포라는 무기가 어떻게 작동하고 왜 미사일 시대에도 남아 있는지 이어서 봅니다.
- 베트남 전쟁 한눈에: 1955년부터 1975년까지: 이아드랑 앞뒤의 큰 흐름을 봅니다.
- 구정 공세: 군사 결과와 여론이 엇갈린 공세: 이아드랑 두 해 뒤인 1968년의 큰 공세를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