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9월 초, 프랑스 북동부의 작은 요새 도시 세당(Sedan)에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부대 가운데서 죽지 못했으니, 제 칼을 폐하의 손에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프랑스 황제가 포로가 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끝났을까요? 흔히 드는 답은 프로이센의 참모본부와 철도입니다. 이 글은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독일에서는 독일-프랑스 전쟁)이 왜 일어났고 어떻게 흘러갔는지 따라가면서, 그 답이 어디까지 맞는지 봅니다. 동원과 무기만으로는 설명이 다 되지 않는 부분, 그리고 자료마다 다른 숫자도 함께 적습니다.
1866년 이후: 왜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맞섰나
1866년 7월 3일 쾨니히그레츠(Königgrätz, 프랑스 쪽 이름은 사도바)에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이겼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에서 밀려났고,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마인강 북쪽의 독일 국가들을 묶어 북독일 연방을 세웠습니다. 바이에른·뷔르템베르크·바덴·헤센 같은 남쪽 국가들은 그 뒤 프로이센과 비밀 동맹을 맺었습니다.
프랑스는 독일 안에서 커지는 프로이센의 힘을 걱정했고, 유럽 대륙에서 누리던 우위를 잃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DHM)의 해설에 따르면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군사 충돌을 길게는 피할 수 없다고 확신했고, 전쟁을 독일 통일을 마무리할 수단으로 봤습니다.
군대 쪽 준비도 달랐습니다. 프로이센에서는 1860년 큰 군제 개혁 법안이 의회에 올라갔고, 비스마르크는 의회 동의 없이 개혁을 밀어붙였습니다. 이 분쟁은 1866년 승리 뒤 하원이 지난 군사비를 모두 소급해 승인하면서 끝났습니다. 프랑스에서도 니엘(Niel) 원수가 1867년 2월 1일 개혁 법안을 냈지만, 의회가 1868년 12월 14일 통과시킨 것은 복무 기간을 7년에서 5년으로 줄이는 법이었습니다.
엠스 전보: 전보 한 통이 불을 붙이다
불씨는 스페인 왕위였습니다. 1870년 7월 2일, 호엔촐레른 가문의 한 갈래인 레오폴트(Leopold) 공자가 비어 있는 스페인 왕위 후보라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프랑스로서는 남서쪽 측면이 위협받는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프랑스가 항의하자 레오폴트는 7월 12일 후보에서 물러났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7월 13일 휴양지 바트 엠스(Bad Ems)에서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Benedetti)가 빌헬름 1세에게, 앞으로도 호엔촐레른 가문의 후보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보증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왕은 거절했고, 대화 내용을 전보로 비스마르크에게 알렸습니다.
비스마르크는 같은 날 이 전보를 줄이고 고쳐 신문에 공개했습니다. 나폴레옹 재단(Fondation Napoléon)의 해설을 보면, 고친 글은 프로이센 왕과 프랑스 대사가 서로 모욕한 것처럼 읽혔습니다. 전보는 독일과 프랑스 양쪽에서 민족적 분노를 불렀습니다.
프랑스 의회에서는 티에르(Adolphe Thiers)를 비롯한 일부 의원이 군대가 준비되지 않았다며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동원령은 7월 14일 서명됐고, 다음 날 다수 의원이 전쟁 예산에 찬성했습니다. 프랑스는 7월 19일 프로이센에 선전 포고했습니다. DHM은 그 결과 유럽 여론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평화를 깬 쪽으로 여겨졌다고 적습니다.
남독일 국가들은 프랑스의 예상과 달리 망설이지 않고 프로이센 편에 섰고, 1870년 자기 군대를 프로이센 최고 지휘 아래 두었습니다. 독일의 이웃 나라들은 중립을 지켰습니다. 프랑스는 1868년 겨울과 1870년 6월 오스트리아와 협력을 논의했지만 아무 협정도 맺지 못했습니다.
1870년 7월부터 1871년 5월까지 한 장의 연표
첫 싸움은 국경 가까이에서 났습니다. 바이센부르크(Weißenburg)와 뵈르트(Wörth)에서 독일군이 이겼고, 슈피헤른(Spicheren) 고지를 빼앗았습니다.
8월 16일 비옹빌(Vionville)에서 첫 큰 결전이 벌어졌고, 이틀 뒤인 8월 18일 그라블로트(Gravelotte)에서 전쟁 전체에서 가장 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 싸움을 생프리바(Saint-Privat) 전투라고 부릅니다. 진 쪽인 바젠(Bazaine) 원수의 라인군은 메스(Metz) 요새로 물러났습니다.
막마옹(Mac-Mahon) 원수가 메스를 구하러 나섰지만, 이 시도는 9월 1~2일 세당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잡힌 뒤 9월 4일 프랑스에서는 군주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의 국방 정부가 섰습니다. 새 정부는 싸움을 이어 갔습니다.
전쟁은 여기서 두 번째 국면으로 넘어갑니다. 독일군은 9월 중순 파리를 둘러쌌는데, 포위가 시작된 날은 DHM의 전쟁 해설과 연표에서 9월 13일과 9월 18일로 갈립니다. 지방에서는 서둘러 꾸린 공화국 군대가 끈질기게 싸웠습니다.
10월 27일 메스의 라인군이 항복했습니다. 12월 31일 독일 대포가 파리 포격을 시작했고, 파리는 1871년 1월 28일 항복했습니다. 같은 날 휴전이 서명됐습니다. 2월 1일 궁지에 몰린 공화국 사단들이 스위스로 넘어가 무장 해제된 것이 프랑스 저항의 끝이었습니다.
참모본부와 철도: 전쟁 전에 짜 둔 군대
이 전쟁에서는 수십만 명의 군대가 맞섰습니다. 철도와 산업, 사거리가 긴 포병 같은 근대 기술이 작전의 흐름을 정했습니다. 독일 쪽 전쟁 지도의 중심에는 프로이센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1800~1891)가 있었습니다. 서쪽 국경으로의 독일군 집결은 철도 덕분에 빨리 이루어졌습니다.
몰트케가 철도를 처음 쓴 것은 아닙니다. 1866년 그는 전신과 철도로 큰 부대를 여러 방향에서 그때까지 없던 속도로 보헤미아 북쪽에 모았고, 프로이센의 세 군이 쾨니히그레츠에서 만났습니다. 다만 이긴 프로이센군도 곧 보급 문제와 콜레라에 시달렸습니다. 빠른 집결이 그 뒤의 군수(logistics)까지 풀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철도망도 이미 커져 있었습니다. 독일 연방의 철도는 1840년부터 1850년 사이에 열 배로 늘어 약 5,700 km가 됐습니다. 다만 나라마다 주권이 있어서 독일 전체의 노선을 함께 정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1871년 제국이 선 뒤 각 나라가 민간 철도를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철도의 군사적 중요성이 커진 것도 그 이유의 하나였습니다.
두 군대의 짜임은 나폴레옹 재단에 실린 조르주 스필만(Georges Spillmann)의 글에 자세히 나옵니다. 패배의 책임을 나폴레옹 3세에게만 돌리지 말자는 논지를 펴는 글이어서, 여기서는 제도와 숫자만 가져옵니다.
독일 쪽에서는 프로이센 왕이 연방군을 실제로 지휘했고, 몰트케와 전쟁장관 론(Albrecht von Roon)이 도왔습니다. 몰트케가 전략을 맡았다면, 1858년부터 1878년까지 전쟁장관이던 론은 군을 관리하고 물자를 대며 평시에서 전시로 넘어가는 동원을 준비했습니다. 1810년에 세운 전쟁대학(Kriegsakademie)이 고급 군사 교육을 맡았습니다.
부대도 평시부터 짜여 있었습니다. 독일의 군단은 모두 평시에 이미 편성돼 있었고, 부대들은 한 해 내내 함께 기동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프랑스의 평시 조직은 전투 단위가 아니라 지역 단위였습니다. 황제 아래에는 참모총장이 없고 권한이 분명하지 않은 참모장(major-général)만 있었습니다.
니엘이 죽은 뒤 그의 편성 계획은 서랍에 들어갔습니다. 동원이 시작된 뒤에야 군단·사단·여단을 무질서하게 즉석에서 짰습니다.
결과는 숫자에 나옵니다. 프랑스 동원은 느리고 무질서했고, 라인군은 처음에 22만 2,000명을 모은 뒤 그 수를 끝내 넘지 못했습니다. 맞은편 독일 3개 군은 50만 6,000명이었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은 같은 무렵을 독일 연합군 약 51만 9,000명, 프랑스 직업군 33만 6,000명으로 셉니다. 무엇을 세느냐에 따라 숫자는 다르지만, 어느 쪽 숫자로 봐도 독일 쪽 병력이 더 많습니다.
샤스포 소총, 크루프 대포, 미트라예즈
무기만 보면 그림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습니다. 프랑스 보병은 샤스포(Chassepot) 소총을 들었습니다. 재단에 실린 장프랑수아 브룅(Jean-François Brun)의 글은 기계로 무기를 만드는 방식이 1866년 이 소총에서야 시작됐다고 적습니다.
프로이센 보병의 소총은 드라이제(Dreyse) 바늘총이었습니다. 스필만은 샤스포가 사거리·정확도·발사 속도에서 드라이제보다 크게 앞섰다고 평가합니다.
대포는 반대였습니다. 프랑스 야포는 청동으로 만들고 포신 안에 강선을 새겼지만, 여전히 포구, 곧 앞쪽으로 탄을 넣었습니다. 독일의 크루프(Krupp) 포는 강철로 만들었고 포미, 곧 뒤쪽을 열어 탄을 넣었습니다.
프랑스 4파운드 포의 사거리는 1,850 m였고, 3,000 m까지 쏘는 12파운드 포는 30개 포대뿐이었습니다. 크루프 포의 사거리는 3,000 m를 넘었습니다.
수도 달랐습니다. 프랑스 야포 986문에 독일은 2,046문을 맞세웠습니다. 대포의 사거리와 수, 장전 방식을 두고 스필만은 프랑스 포병이 독일 포병에 크게 밀렸다고 봅니다.
프랑스에는 새 무기도 하나 있었습니다. 보병 소총의 총열 여러 개를 묶은 '탄환 포(canon à balles)', 흔히 미트라예즈(mitrailleuse)라고 부르는 무기 190문입니다. 아주 비밀리에 만들어 전쟁 전에 시험해 보지 못했고, 의회가 예산을 거부해 황제 개인 돈으로 샀습니다. 크기가 4파운드 포만 해서 눈에 잘 띄었고, 쏘기 시작한 뒤 곧 독일 포대에 부서지는 일이 잦았습니다.
오늘 그라블로트의 보불전쟁과 합병 박물관에는 프랑스 군사박물관(Musée de l'Armée)에서 빌려 온 1858년형 4파운드 야포와 레피(Reffye) 포가 놓여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2014년 4월 생프리바 전투가 벌어진 자리에 문을 열었고, 전시 설명을 프랑스어·독일어·영어로 붙였습니다.
세당과 메스, 그리고 파리 포위
1870년 9월 1일 새벽, 나폴레옹 3세는 세당에 물러나 있었습니다. 재단에 실린 에메릭 조브(Eymeric Job)의 글은 프랑스군을 12만 명과 대포 600문 가까이, 몰트케가 세운 독일군을 20만 명과 대포 800문으로 적습니다. 황제는 비옹빌과 그라블로트의 큰 손실 뒤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려고 철도로 부대에 와 있었습니다.
이날 아침 막마옹이 포탄 파편에 크게 다쳐 지휘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뒤 프랑스군은 잇달아 바뀐 세 지휘관에게서 서로 다른 명령을 받았고 크게 혼란스러웠습니다. 저녁에 황제는 앞의 편지를 보냈고, 다음 날 정오 무렵 프랑스의 빔펜(Wimpffen) 장군과 몰트케가 항복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포로 8만 명은 이주(Iges) 반도로 끌려갔고, 황제는 9월 3일 프랑스를 떠나야 했습니다.
메스의 항복은 더 컸습니다. 10월 27일 메스에 갇혀 있던 라인군이 항복하면서 약 17만 명이 포로가 됐습니다.
파리는 넉 달을 버텼습니다. 10월 7일 내무장관 강베타(Léon Gambetta)가 열기구를 타고 포위된 도시를 빠져나가, 지방에서 구원군을 꾸리려 했습니다. 12월 31일에는 포격이 시작됐고, 파리는 1871년 1월 28일 항복했습니다.
베르사유와 프랑크푸르트: 전쟁이 남긴 것
전쟁은 독일을 하나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전쟁 중에 남독일 국가들이 북독일 연방에 들어갔고,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선포됐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베르사유라는 장소에서 한 선포가, 그리고 무엇보다 알자스-로렌을 넘긴 일이 치욕이었습니다.
2월 26일 베르사유 예비 강화로 전투가 끝났고,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프랑스는 벨포르(Belfort)를 뺀 알자스와 메스 요새를 포함한 로렌 북부를 독일에 넘겼고, 배상금 50억 프랑을 내야 했습니다.
조약은 지불 일정도 정했습니다. 파리에 정부 권위가 돌아온 뒤 30일 안에 5억 프랑, 그해 안에 10억 프랑, 1872년 5월 1일에 5억 프랑, 마지막 30억 프랑은 1874년 3월 2일까지였습니다. 독일군은 돈이 들어오는 만큼 점령지에서 차례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알자스-로렌의 이야기는 1871년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독일 쪽에서는 국경 안보라는 군사 전략적 고려와 옛 독일 땅을 되찾자는 민족적 요구가 합병에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프랑스 전역에는 분노가 일었고, 1871년 10월 1일 기한까지 주민 약 10%가 프랑스 국적을 택했습니다.
이 땅을 되찾는 일은 1차 대전까지 프랑스 외교의 중심 목표가 됐고, 1918년 12월 6일 그 지역 의회가 프랑스 편입에 찬성했습니다. 주민들은 세 세대 안에 국적이 네 번 바뀌었습니다.
프랑스 안에서도 전쟁의 끝은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1871년 3월 18일 파리에서 봉기가 일어나 정부가 베르사유로 피했고, 파리 코뮌이 섰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5월 21~28일 코뮌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유럽의 다른 조약도 흔들렸습니다. 1870년 10월 31일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크림 전쟁을 끝낸 1856년 파리 조약의 흑해 연안 요새 금지를 무효라고 선언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지지했고, 러시아는 그 대신 보불전쟁에서 중립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참모본부와 철도가 이 승리를 만들었을까요? 빠른 집결과 평시에 짜 둔 군단은 분명히 큰 몫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곁에는 남독일 국가들이 바로 합류하고 이웃 나라들이 중립을 지킨 외교, 독일 쪽에 훨씬 많았던 병력과 대포, 세당에서 흔들린 프랑스 지휘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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