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4년 4월 12일 월요일, 북풍이 불어 배들을 콘스탄티노플 성벽 쪽 기슭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서로 묶인 두 배 가운데 '순례자호'의 사다리 끝이 탑에 닿았고, 베네치아 사람 한 명과 프랑스 기사 한 명이 그 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무너졌습니다.

이 군대는 원래 이집트로 가려던 십자군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되찾겠다고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 왜 기독교 도시 둘을 차례로 쳤을까요? 남은 기록은 원정을 이끈 쪽, 그 밑의 가난한 기사, 성 안의 비잔틴 역사가, 그리고 로마의 교황이 저마다 다르게 남겼습니다.

이 글은 그 기록들을 나란히 놓고 돈, 황위 다툼, 교황의 금지가 어떻게 얽혔는지 따라갑니다.

이집트로 가려던 원정

1198년 1월 8일 교황에 오른 인노첸시오 3세(Innocent III)는 즉위 때부터 예루살렘 회복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성직자 뇌이의 풀크(Fulk of Neuilly)에게 십자군을 설교하게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한 해 동안 군에서 복무하면 고해한 죄를 모두 용서받는다는 약속이 함께 퍼졌습니다.

1199년 11월 28일, 샹파뉴의 에크리(Ecri) 성에서 기마 시합이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샹파뉴 백작 티보(Thibaut)와 블루아 백작 루이(Louis)가 십자가를 졌습니다. 티보는 스물두 살을 넘지 않은 젊은이였습니다. 이 원정의 가장 자세한 기록은 샹파뉴의 원수 조프루아 드 빌라르두앵(Geoffroi de Villehardouin)이 남겼습니다.

티보는 떠나기 전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제후들은 수아송에 모여 몬페라토 후작 보니파시오(Boniface of Montferrat)에게 지휘를 맡아 달라고 청했고, 그가 받아들였습니다.

목적지는 처음부터 이집트였습니다. 회의에서는 바빌론, 곧 카이로로 가기로 정했습니다. 그곳을 치는 것이 튀르크 세력에 가장 큰 타격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겉으로는 "바다 건너"로 간다고만 알렸습니다.

베네치아와의 계약과 갚지 못한 빚

제후들은 앞선 원정의 경험을 보고 바닷길을 골랐습니다. 배를 넉넉히 댈 수 있는 도시로는 베네치아가 꼽혔습니다. 1201년 2월, 빌라르두앵을 포함한 사절 여섯이 베네치아에 닿아 도제(Doge, 베네치아의 원수)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를 만났습니다.

약속은 컸습니다. 빌라르두앵의 기록으로 베네치아는 말 4,500필과 종자 9,000명을 실을 수송선, 기사 4,500명과 보병 20,000명을 실을 배를 대고, 사람과 말에게 아홉 달 치 식량을 주기로 했습니다.

값은 말 한 필에 4마르크, 사람 한 명에 2마르크, 모두 85,000마르크였습니다. 베네치아는 무장 갤리선 50척을 보태는 대신, 동맹이 이어지는 동안 얻는 땅과 돈의 절반을 갖기로 했습니다. 원정군은 1202년 성 요한 축일까지 베네치아에 모이기로 했습니다.

두 칸으로 나눈 숫자 비교 도표. 왼쪽 칸은 1201년 베네치아와 맺은 약속: 기사 4,500명, 종자 9,000명, 보병 20,000명, 말 4,500필, 아홉 달 치 식량, 85,000마르크, 갤리선 50척과 정복의 절반. 오른쪽 칸은 1202년 베네치아에서 실제로 생긴 일: 클라리 기록으로 기사 1,000명 이하와 보병 50,000~60,000명 이하(클라리가 적은 주문 규모는 기사 4,000명, 보병 100,000명), 남은 빚은 클라리 기록으로 50,000마르크에서 다시 걷은 뒤 36,000마르크, 빌라르두앵 기록으로 34,000마르크. 아래 줄에 1203년 알렉시오스 황자의 약속 200,000마르크와 클라리가 적은 첫 지불 100,000마르크
약속한 숫자와 실제 숫자. 두 참가자의 기록이 서로 다른 곳은 따로 적었습니다 (도표)(도표)

1202년 여름, 사람은 약속만큼 오지 않았고 원정에 함께한 가난한 기사 로베르 드 클라리(Robert de Clari)의 기록에서 도제는 이렇게 따집니다. 기사 4,000명과 보병 100,000명분의 배를 주문해 놓고, 기사는 1,000명도 안 되고 보병은 50,000~60,000명을 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항구로 떠난 뒤였습니다. 이 주문 규모는 앞에서 본 계약 숫자와 다릅니다.

돈도 모자랐습니다. 클라리의 기록으로는 한 번 걷은 뒤에도 50,000마르크가 남았고, 다시 걷고 빌려 낸 뒤에도 36,000마르크가 남았습니다. 빌라르두앵의 기록에서는 제후들이 가진 것과 빌릴 수 있는 것을 다 내놓아 금은 그릇이 도제의 궁으로 실려 갔지만, 그래도 은 34,000마르크가 모자랐습니다. 도제는 베네치아 상인들이 이 함대를 준비하느라 한 해 반 동안 장사를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자라: 기독교 도시를 친 첫 걸음

해결책은 도제 쪽에서 나왔습니다. 도제는 겨울이라 바다를 건널 수 없으니, 가까운 도시 자라(Zara)에서 겨울을 나자고 합니다. 자라 사람들이 베네치아에 해를 많이 끼쳤으니 벌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이 계획은 지휘관들만 알았습니다.

원정군은 1202년 11월 10일 자라 앞에 닿아 다음 날 포위를 시작했습니다. 자라 사람들은 목숨만 살려 주면 항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시토회의 보(Vaux) 수도원장이 일어나 교황의 이름으로 공격을 금했습니다. "주민은 기독교인이고 여러분은 순례자"라는 이유였습니다. 결국 도시는 주민의 목숨을 살려 준다는 조건으로 도제에게 항복했고, 도제는 도시를 둘로 나눠 반씩 갖자고 했습니다.

교황은 기독교 도시를 공격하는 일에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1203년 여름 교황이 지휘관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들은 자라 일로 파문을 당했고 교황의 지시대로 속죄하겠다고 맹세한 뒤 사면을 받았습니다.

교황은 그 편지에서 그리스인의 땅을 빼앗거나 약탈해도 된다고 여기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파문을 걸고 기독교인의 땅을 침입하지 말라는 금지도 붙였습니다. 다만 그들이 길을 일부러 막거나 다른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는 예외로 두었습니다.

원정군은 그 겨울을 자라에서 났습니다. 1203년 4월 7일, 부활절 다음 날 배에 짐을 실었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떠나면서 도시의 성벽과 탑을 허물었습니다.

비잔틴 황자의 제안

자라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원정군은 셈을 해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바빌론이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로 갈 식량도 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보니파시오가 독일 황제 슈바벤의 필리프(Philip of Swabia)의 궁정에서 본 젊은이 이야기를 꺼냅니다. 비잔틴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Isaac II Angelos)의 아들 알렉시오스였습니다. 이사키오스의 형제가 반역으로 제위를 빼앗고 이사키오스의 눈을 멀게 한 뒤였습니다.

제안은 거창했습니다. 빌라르두앵이 적은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알렉시오스가 제위를 되찾으면 비잔틴 제국 전체를 로마 교회에 복종하게 하고, 은 200,000마르크와 군 전체의 식량을 줍니다.

알렉시오스는 직접 함께 이집트로 가거나 자기 비용으로 10,000명을 보내 한 해 동안 복무하게 하고, 평생 자기 비용으로 바다 건너 성지에 기사 500명을 두겠다고 했습니다.

원정군 안은 둘로 갈렸습니다. 보 수도원장과 그 편은 기독교인과 싸우는 일이라며 시리아로 가자고 했습니다. 다른 쪽은 시리아에 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원정군을 버리고 다른 항구로 떠난 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보라고 맞섰습니다.

결국 조약은 맺어졌지만, 먼로가 옮긴 기록으로 프랑스 쪽에서 맹세한 사람은 열두 명뿐이었습니다. 배를 한 해만 빌렸는데 벌써 반이 지났다는 반대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클라리는 보니파시오가 콘스탄티노플 황제에게 당한 일을 갚고 싶어 했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교황도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1202년 11월 16일, 자라가 무너지기 한 주 전에 교황이 비잔틴 황제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교황은 그 편지에서 알렉시오스가 전에 자신을 찾아와 아버지가 부당하게 갇히고 눈을 잃었다고 호소한 일을 꺼냈습니다. 이 편지를 영어로 옮긴 리즈 대학의 G. A. 라우드(G. A. Loud)는 이것을 방향 전환을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로 꼽습니다.

네모와 화살표로만 그린 길 순서 도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베네치아(1202년 여름 집결, 빚), 자라(1202년 11월 10일 도착, 항복, 겨울나기), 코르푸(1203년 5월 24일 떠남), 콘스탄티노플(1203년 6월 23일 도착, 7월 17일 1차 공격, 1204년 4월 12일 함락)이 이어진다. 위쪽에 흐린 점선으로 처음 목표였던 이집트(바빌론, 곧 카이로)로 가는 길이 그려져 있고 가지 않았다는 표시가 있다. 실제 지도가 아니고 축척이 없다는 메모가 있다
베네치아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거쳐 간 곳의 순서. 지도가 아니라 순서만 보인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콘스탄티노플 두 번의 공격

함대는 1203년 5월 24일 코르푸를 떠나 6월 23일 콘스탄티노플에서 3리그 떨어진 성 스테파노 수도원 앞에 닻을 내렸습니다. 도시의 항구는 갈라타(Galata) 탑에 매인 사슬로 막혀 있었습니다. 원정군은 탑을 빼앗고 사슬을 넘어 항구 안으로 배를 들였습니다.

어디로 칠지를 두고 의견이 갈렸습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사다리를 배 위에 세워 바다 쪽 성벽을 치자고 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바다에서는 땅에서만큼 제 몸을 잘 지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베네치아는 바다로, 프랑스 제후들은 땅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1203년 7월 17일 목요일, 첫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땅 쪽에서는 바다 가까운 바깥 보루에 사다리 둘을 세웠지만, 성벽을 지키던 잉글랜드인과 덴마크인 부대가 오른 사람들을 밀어냈습니다.

바다 쪽에서는 늙고 앞을 보지 못하던 도제 단돌로가 갑옷을 입고 뱃머리에 서서 자신을 뭍에 내려 달라고 외쳤습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탑 스물다섯 개를 차지했습니다. 황제의 군대가 몰려오자 그들은 사이의 건물에 불을 놓고 물러났습니다.

그날 밤 황제 알렉시오스 3세가 가져갈 수 있는 만큼 보물을 챙겨 도시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시민들은 눈을 잃고 갇혀 있던 이사키오스를 다시 제위에 앉혔습니다. 아들 알렉시오스는 1203년 8월 1일 공동 황제로 대관했습니다. 이제 알렉시오스 4세가 된 그가 약속을 지킬 차례였습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클라리는 새 황제가 100,000마르크를 냈고, 그중 절반이 베네치아로 갔으며, 원정군이 진 배 값 36,000마르크도 그 돈으로 갚았다고 적었습니다. 그 뒤로 돈은 끊겼습니다.

이 사료를 엮은 데이나 먼로(Dana C. Munro)는 복위한 황제 부자가 약속을 지키는 일이 전혀 불가능했다고 보았습니다. 원정군의 사절은 궁정에서 황제에게 약속을 어겼다고 공개적으로 따졌고, 황제는 이미 너무 많이 냈다고 답했습니다.

도시 안의 사정도 나빠졌습니다. 그리스인과 콘스탄티노플에 살던 라틴인 사이에 다툼이 일었고, 누군가 도시에 불을 놓았습니다. 그 불은 이틀 낮 이틀 밤 이어졌고 불길의 앞이 반 리그를 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셀 수 없었습니다.

1204년 1월, 황제의 신임을 받던 무르주플로스(Mourzuphles)가 밤중에 알렉시오스 4세를 잡아 가두고 스스로 황제가 됐습니다. 이사키오스는 곧 병들어 죽었고, 갇힌 알렉시오스 4세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원정군이 기대던 약속은 이제 받을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양쪽은 공격하기 전에 나눔부터 정했습니다. 도시를 차지하면 전리품을 한데 모아 나누고, 프랑스인 여섯과 베네치아인 여섯이 새 황제를 뽑습니다. 황제는 정복지의 4분의 1을 갖고, 나머지 4분의 3은 베네치아와 원정군이 반씩 나누기로 했습니다.

1204년 4월 8일 원정군은 다시 배에 올랐습니다. 다음 날 금요일, 백 곳이 넘는 자리에서 공격했지만 밀려났습니다. 그날은 공격한 쪽이 그리스인보다 더 많이 잃었습니다. 사흘 뒤인 4월 12일 월요일, 두 번째 공격에서 도시가 무너졌습니다.

배와 성벽: 바다 쪽에서 오른 공성

이 원정의 공성은 많은 부분이 물 위에서 벌어졌습니다. 1203년에도 1204년에도 베네치아의 배가 사다리를 싣고 바다 쪽 성벽에 다가갔습니다. 배 위의 사다리가 성벽에 아주 가까워져, 여러 곳에서 탑 위의 사람과 사다리 위의 사람이 칼과 창을 맞댔습니다.

4월 9일의 실패 뒤 원정군은 방식을 바꿨습니다. 배 한 척이 탑 하나를 맡으니 탑 안의 사람이 사다리 위의 사람보다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다리를 실은 배를 두 척씩 묶어 탑 하나를 함께 치게 했습니다. 4월 12일 탑에 처음 닿은 순례자호와 낙원호가 그렇게 묶인 한 쌍이었고, 그 사다리를 탑에 닿게 한 것은 북풍이었습니다.

성 쪽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약속이 깨진 뒤 양쪽의 싸움이 한겨울까지 이어지던 무렵, 그리스인들은 큰 배 일곱 척에 불을 붙여 바람에 실어 원정군 함대로 보냈습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갤리선과 작은 배로 뛰어들어 갈고리로 불배를 끌어내 해협의 물살에 띄워 보냈고, 잃은 것은 상품을 실은 피사 배 한 척뿐이었습니다. 1204년에는 성벽 아래의 원정군 위로 화살과 돌, 끓는 역청, 그리고 비잔틴의 소이 무기인 '그리스 불(Greek fire)'이 쏟아졌다고 클라리가 전합니다.

약탈과 라틴 제국

도시가 무너진 뒤 약탈이 이어졌습니다. 빌라르두앵은 세상이 생긴 뒤로 한 도시에서 이만큼 전리품을 얻은 적이 없다고 썼습니다. 그는 원정군이 무장한 사람 2만도 안 되는 수로 40만이 넘는 사람을 이겼다고도 적었는데, 이것은 그의 기록에 적힌 숫자입니다.

전리품은 약속대로 교회 세 곳에 모으게 했지만 다 모이지 않았습니다. 적지 않은 이가 교황의 파문에도 물건을 숨겼고, 훔친 것이 드러난 이들 가운데 여럿이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모인 것은 프랑스인과 베네치아인이 반씩 나눴습니다. 원정군은 자기 몫에서 은 50,000마르크를 베네치아에 낸 뒤, 적어도 100,000마르크를 자기들끼리 나눴습니다.

교회의 보물도 서쪽으로 갔습니다. 마르탱 수도원장은 성인들의 유물을 챙길 궁리를 했고, 그가 가져간 유물 목록에는 십자가 조각도 들어 있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도시의 보물이 베네치아인, 프랑스인, 다른 원정군에게 나뉘었고, 그 가운데 가장 큰 몫이 지금도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 보물관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새 황제도 뽑았습니다. 열두 선거인이 플랑드르와 에노의 백작 보두앵(Baldwin)을 골랐고, 그는 1204년 5월 16일 대관했습니다. 이렇게 콘스탄티노플에 라틴 제국이 섰습니다. 그 나라는 오래가지 못했고, 1261년 비잔틴이 도시를 되찾았습니다.

가로 연표 도표. 1198년 1월 인노첸시오 3세 선출, 1199년 11월 에크리 기마 시합의 서원, 1201년 베네치아 계약, 1202년 11월 자라, 1203년 6월 콘스탄티노플 도착과 7월 1차 공격, 8월 1일 알렉시오스 4세 대관, 1204년 1월 무르주플로스, 4월 12일 함락, 5월 16일 보두앵 대관, 오른쪽 끝에 1261년 비잔틴의 도시 회복
1198년에서 1261년까지.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같은 사건, 다른 기록

4차 십자군을 읽을 때는 누가 어디에서 보고 적었는지를 먼저 따져야 합니다. 먼로는 빌라르두앵과 클라리를 가장 중요한 두 기록으로 꼽았습니다. 빌라르두앵은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 공식적인 기록을 남겼고, 클라리는 가난한 기사의 한 사람으로 군의 대다수가 알고 생각한 것을 적었습니다. 그래서 클라리로 빌라르두앵의 말을 견줘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자주 어긋납니다. 계약의 숫자가 다르고, 남은 빚의 액수가 다릅니다. 자라를 두고도 클라리는 도제의 제안이 둘(모두가 반긴 것과 지휘관만 안 것)이었다고 적었지만, 빌라르두앵은 하나였던 것처럼 썼습니다.

성 안에서 본 기록도 있습니다. 비잔틴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Niketas Choniates)는 성상이 짓밟히고,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이 조각나 병사들에게 나뉘었다고 적었습니다. 거리와 골목과 교회마다 울음이 가득했고, 슬픔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먼로는 인노첸시오 3세의 편지들을 근거로 니케타스의 기록이 과장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교황의 편지는 또 다른 쪽에서 본 기록입니다. 포덤 대학 사료집의 소개로는 인노첸시오 3세가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크게 노했습니다.

7월 12일 자 편지에서 그는 사절을 꾸짖으며, 그리스 교회가 라틴인에게서 멸망의 본보기만 보는데 어떻게 교회 통합으로 돌아오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원정군이 나이도 성별도 가리지 않았고 제단의 은판까지 뜯어 나눴다고도 썼습니다. 그러나 노여움이 가라앉은 뒤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의 새 질서를 먼저 인정하고 이어 받아들였습니다.

누가 원정의 방향을 틀었느냐는 오래된 다툼거리입니다. 포덤 사료집의 편집자는 돈 문제가 이어지면서 수송을 맡은 베네치아가 원정을 자기 목적으로 돌릴 수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베네치아가 이집트 술탄과 몰래 조약을 맺었다는 설도 19세기에 뜨겁게 다퉈졌습니다. 영국 학자 피어스(Pears)는 그런 조약이 있었다고 보았고, 프랑스 학자 바이(Wailly)는 날짜가 맞지 않는다며 그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1997년 사료집에 덧붙인 메모는 오늘날 학자 거의 모두가 이 밀약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단돌로를 둘러싼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가 예전에 콘스탄티노플에 사절로 갔다가 그리스인에게 눈을 잃어 원한을 품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빌라르두앵을 영어로 옮긴 마셜스(Marzials)는 그랬다면 빌라르두앵이 적지 않았을 리 없다며 이 이야기를 의심했습니다. 그가 아주 나이가 많았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나이와 눈이 먼 까닭은 지금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결과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원정이 거듭될수록 비잔틴과 서방의 관계가 멀어졌다고 설명합니다. 포덤 사료집의 소개는 이 원정의 결과로 그리스와 에게해에 라틴 국가들이 생기고, 가톨릭과 정교회의 친교가 영영 무너졌다고 적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1차 십자군: 왜 유럽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갔나: 백여 년 전 처음 콘스탄티노플을 지나간 원정을 봅니다.
  • 살라딘과 3차 십자군: 하틴에서 아르수프까지: 4차 십자군이 되찾으려 했던 예루살렘을 잃은 경과를 봅니다.
  • 비잔틴 제국과 그리스의 불: 비밀로 남은 무기: 콘스탄티노플이 바다에서 쓴 소이 무기를 봅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배와 식량, 돈이 군대의 길을 어떻게 정하는지 현대의 예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