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의 높은 능선 위에 크락 데 슈발리에(Krak des Chevaliers)라는 성이 서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이 성을 십자군 시대 성 가운데 가장 잘 남은 예의 하나로 꼽습니다. 이 성을 130년 가까이 지은 이들은 왕도 영주도 아니었습니다. 청빈·정결·순명을 맹세한 수도사이면서 말과 칼을 가진 기사들, 곧 구호기사단이었습니다.
수도사가 왜 성을 짓고 칼을 들었을까요? 1099년 예루살렘을 차지한 뒤 십자군 앞에 남은 물음에서 그 답이 시작됩니다.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 튜턴 기사단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규칙으로 움직였는지, 1291년 뒤 세 기사단이 왜 전혀 다른 길로 갈라졌는지를 원사료 번역과 유네스코 기록으로 따라갑니다.
함락 뒤에 남은 물음: 누가 지키나
1099년 6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에워쌌습니다. 5주 뒤인 7월 15일에 도시가 무너졌습니다. 그 뒤 십자군은 새로 세운 영토를 지키려고 성지 곳곳에 요새화한 성을 많이 지었습니다.
성을 세웠다고 길까지 안전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순례자가 오가는 길에는 도적과 강도가 있었습니다. 성전기사단의 첫 임무가 바로 이 길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종류의 무리가 나타납니다. 기사단(military order)입니다. 기사단의 형제들은 수도사처럼 서원을 하고 글로 쓴 규칙을 따랐습니다. 동시에 말을 타고 싸웠고, 한 명의 단장(Master) 명령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성전기사단: 수도사이면서 기사
출발은 아주 작았습니다. 1118년, 기사 신분의 귀족 몇 사람이 예루살렘 총대주교 앞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겠다고 맹세했습니다. 12세기 연대기 작가 윌리엄 오브 티레(William of Tyre)가 남긴 이야기이고, 연도는 그 번역의 편집자가 붙인 것입니다. 앞장선 이는 위그 드 파앵(Hugh of Payens)과 조프루아 드 생토메르(Geoffrey of St. Omer)였습니다.
총대주교와 주교들은 이들에게 첫째 임무를 맡겼습니다. 도적의 공격에서 길을 지키고, 무엇보다 순례자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왕은 이들에게 궁전 남쪽 날개, '주님의 성전' 가까이에 거처를 내주었습니다. 성전 옆에 본부가 있었으니 '성전 기사 형제들'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창설 이야기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중세 군사사 학회(De Re Militari)의 소개 글은 1118년 보두앵 2세 때 샹파뉴의 기사 위그와 동료 여덟이 그리스도교 왕국을 지키겠다고 영원한 서원을 했다고 정리합니다. 1187년 뒤에 쓰인 에르눌 연대기에서는 성묘에 몸을 바친 기사들이 왕에게 "싸움에서 우리를 이끌 지휘자를 하나 세우기로 했다"고 말합니다. 순례자의 길, 왕국의 방어, 싸움터의 지휘자라는 세 갈래 이야기가 나란히 남아 있는 셈입니다.
처음 몇 해는 조용했습니다. 윌리엄에 따르면 기사들은 창설 뒤 9년 동안 세속의 옷을 입었고, 아홉째 해에도 아홉 명뿐이었습니다. 그해 프랑스 트루아(Troyes)에서 공의회가 열려 이들에게 규칙과 흰옷을 주었습니다.
공의회의 해는 자료에 따라 한 해가 다릅니다. 규칙 본문은 1128년 성 일라리오 축일, 기사단 창설 뒤 아홉째 해에 모였다고 적습니다. 포덤 대학 원사료 모음의 편집자와 De Re Militari의 각주는 1129년으로 적습니다. 초기 규칙은 기사단이 그 전 여러 해 동안 쌓은 관습에 크게 기댑니다.
이 낯선 무리를 세상에 알린 사람이 시토회 수도원장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입니다. 그는 12세기 초 『새 기사단 찬양(In Praise of the New Knighthood)』을 썼습니다. 겉으로는 친구 위그 드 파앵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고, 편집자는 기사들에 대한 권고와 일반 사람들을 향한 광고를 합친 글로 볼 수 있다고 소개합니다.
베르나르는 이것이 "지난 시대에 없던 새로운 기사단"이라고 썼습니다. 몸의 힘으로 적과 싸우는 사람은 흔하고, 영의 힘으로 악덕과 싸우는 수도사도 세상에 많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들은 살과 피에 맞선 싸움과 하늘의 악한 무리에 맞선 싸움, 두 겹의 싸움을 한꺼번에 한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습니다.
병원에서 시작한 두 기사단
두 번째 기사단은 칼보다 침대에서 시작했습니다. 몰타 기사단의 공식 역사에 따르면 성 요한 구호기사 공동체의 뿌리는 11세기 후반입니다.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 아말피의 상인들이 이집트 칼리프의 허가를 얻어 예루살렘에 성당과 수도원, 병원을 지었습니다. 세례자 성 요한의 이름을 붙인 이 병원은 순례자를 돕는 곳이었습니다.
1113년 2월 15일, 교황 파스칼 2세의 교서가 성 요한 기사단을 인정했습니다. 1145년에서 1153년 사이에는 레몽 뒤 퓌(Raymond du Puy)가 첫 규칙을 썼습니다. 회원들은 청빈·정결·순명의 세 서원을 했고 가난한 이와 병자를 돌보았습니다.
칼은 나중에 더해졌습니다. 예루살렘 왕국의 체제는 이 기사단에 병자와 순례자를 군사적으로 보호하고, 의료 시설과 큰길을 지키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렇게 신앙의 방어가 병원 일에 더해졌습니다.
세 번째 기사단의 시작은 더 극적입니다. 튜턴 기사단(Teutonic Order) 규칙의 머리말은 1190년, 그리스도교 군대가 아크레(Acre)를 에워싸고 있던 때로 거슬러 갑니다. 브레멘과 뤼베크에서 온 사람들이 병자를 불쌍히 여겨, '코그(cog)'라는 배의 돛 아래에서 병원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교황 첼레스티노에게 청해 두 규칙을 빌려 왔습니다. 병자를 돌보는 일에는 성 요한 병원의 규칙을, 기사에게는 성전기사단의 규칙을 받았습니다. 남은 가장 오래된 규칙 필사본은 1264년의 중세 독일어본입니다.
크락 데 슈발리에: 능선 위의 성채
크락 데 슈발리에는 구호기사단이 1142년부터 1271년까지 지은 성입니다. 13세기 말에는 맘루크(Mamluk)가 더 지었습니다. 한 성에 두 주인의 손길이 겹쳐 있는 것입니다.
유네스코는 이 성을 시리아의 다른 성 하나와 묶어 2006년 세계유산으로 올렸습니다. 칼라트 살라흐 엘딘(Qal'at Salah El-Din), 곧 살라딘 성채입니다. 일부가 무너졌지만 여기에는 층이 더 많습니다. 10세기 비잔틴 시대에 시작했고, 12세기 말 프랑크인이 고쳤으며,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중엽 사이 아이유브(Ayyubid) 왕조가 방어 시설을 더했습니다.
두 성은 모두 방어의 요지인 높은 능선 위에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두 성이 비잔틴, 십자군, 이슬람 시대에 걸친 근동 요새 건축의 변화를 기록한다고 봅니다. 주인이 바뀔 때마다 남은 흔적이 방어 기술이 서로 오갔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군 성채'라는 말은 반쯤만 맞습니다. 이 성들은 한 세력이 한 번에 지은 건물이 아니라, 여러 시대의 주인이 차례로 손댄 결과물입니다. 아래 도표는 누가 언제 손댔는지만 색 띠로 보여 줍니다.
규칙으로 움직이는 군대
기사단을 보통의 기사 무리와 가른 것은 글로 쓴 규칙이었습니다. 성전기사단의 초기 규칙은 기사 형제에게 겨울에도 여름에도, 될 수 있으면 흰 망토를 준다고 정합니다. 옷부터 하나로 맞춘 것입니다.
말과 사람도 규칙이 정했습니다. 기사 형제마다 말 세 마리와 종자 하나를 주었고, 단장의 허락 없이는 말을 세 마리 넘게 두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어느 형제도 자기 뜻대로 싸우거나 쉬지 않고 단장의 명령을 따라야 했습니다.
복장은 뒤에 한 가지가 더해졌습니다. 교황 에우제니오 때부터 기사와 하급 형제들이 망토에 붉은 천 십자가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본 대로 튜턴 기사단은 기사의 규칙을 성전기사단에서 빌려 왔고, 구호기사단은 세 서원 위에 군사 임무를 얹었습니다.
이 무리는 빠르게 커졌습니다. 1170~1174년 무렵 글을 쓰던 윌리엄은 흰 망토를 입은 기사가 300명쯤이고 그 밖의 형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고 적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세계에 재물을 내주지 않은 지방이 없었고, 그 부가 왕의 보물과 맞먹는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커진 만큼 비판도 따랐습니다. 윌리엄은 성전기사단이 뒤에 겸손을 잃고 총대주교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며, 교회의 십일조를 가져가 몹시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고 썼습니다. 처음 아홉 명이 모였던 때와 견주면 반세기 남짓 만에 전혀 다른 무리가 된 셈입니다.
1291년 이후: 서로 다른 세 갈래
13세기 후반, 십자군 국가들은 하나씩 무너졌습니다. 1271년 술탄 바이바르스(Baibars)가 몽포르(Montfort) 성을 차지했습니다. 1291년에는 십자군 도시 아크레가 무너지면서 라틴 십자군 왕국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지켜야 할 땅을 잃은 뒤 세 기사단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성전기사단의 끝은 법정에서 왔습니다. 1311~1312년 비엔(Vienne) 공의회 문서의 소개 글은 성전기사단 고발 건이 공의회가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다룬 일이었다고 적습니다. 공의회를 앞두고 유럽 곳곳에서 기사단 전체와 기사 개인을 놓고 재판이 열렸습니다.
소개 글의 해석으로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큰 힘을 가졌습니다. 1312년 2월 교황과 왕의 사절이 공의회 참석자들과 상의 없이 비밀 협상을 했고, 이 협상으로 필리프가 성전기사단 단죄를 얻었습니다. 3월 20일 왕이 비엔에 왔고, 이틀 뒤 교황이 기사단을 없애는 교서 「복스 인 엑스첼소(Vox in excelso)」를 추기경 위원회에 냈습니다. 교서의 날짜는 1312년 3월 22일입니다.
교서의 말은 조심스럽습니다. 지금까지의 재판으로는 기사단을 이단으로 확정 판결해 단죄할 수 없다고 먼저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씌워진 이단 혐의 때문에 기사단의 이름이 크게 더럽혀졌고, 추기경과 공의회 대표의 5분의 4가 넘는 이들이 사도좌의 처분으로 없애는 편을 택했다고 적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확정 판결이 아니라 사도좌의 처분으로" 기사단과 그 규칙, 옷, 이름을 없앴습니다.
남은 재산은 어디로 갔을까요? 1312년 5월 2일의 교서 「아드 프로비담(Ad providam)」은 새 기사단을 만들기보다 성 요한 구호기사단에 넘기기로 했습니다. 다만 프랑스 밖의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마요르카 왕국에 있던 재산은 이 결정에서 뺐습니다.
구호기사단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아크레를 잃은 뒤 본부와 병원을 키프로스섬 리마솔(Limassol)로 옮겼고, 섬의 자리 덕에 순례자를 지킬 함대를 꾸렸습니다. 1307년에는 로도스(Rhodes)섬에 내렸고, 1310년 섬을 다 얻은 뒤 본부를 옮겼습니다.
로도스 시대는 1523년에 끝났습니다. 술레이만(Suleiman) 대제의 함대·군대와 여섯 달 동안 싸운 끝에 기사들은 섬을 떠났습니다. 1530년에는 황제 카를 5세가 내준 몰타(Malta)를 차지했고,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길에 몰타를 차지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튜턴 기사단은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1309년 단장의 본부가 베네치아에서 폴란드 북부 노가트(Nogat) 강가의 말보르크(Malbork)로 옮겨 왔습니다. 유네스코는 튜턴 기사단 국가가 13세기에 세워졌고, 남발트 해안의 이교도 프로이센인·리투아니아인과 그리스도교 왕국 폴란드를 상대로 십자군을 벌였으며, 14세기에 가장 큰 힘을 가졌다고 정리합니다.
무엇이 남았나
가장 눈에 보이는 유산은 돌과 벽돌입니다. 유네스코는 크락 데 슈발리에를 특히 기사단이라는 맥락에서 중세 성의 원형으로 여긴다고 적었습니다. 두 시리아 성이 유럽의 더 수동적인 방어 체계와 크게 다른 요새 체계의 발전을 보여 준다는 평가도 함께 남겼습니다.
그 성들은 지금 위험 속에 있습니다. 두 성은 2013년부터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올라 있습니다.
북쪽의 말보르크 성은 튜턴 기사단의 13세기 요새 수도원이었고, 1309년 단장이 옮겨 온 뒤 크게 늘고 꾸며졌습니다. 고딕 벽돌 성 단지 가운데 가장 완전한 예로 세계유산에 올라 있습니다.
조직도 남았습니다. 성전기사단은 1312년에 이름까지 사라졌지만, 구호기사단은 키프로스와 로도스, 몰타를 거치며 이어졌습니다. 몰타 기사단의 공식 사이트는 자기 역사를 '11세기부터 오늘까지'라는 제목으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생각이 남았습니다. 서원과 규칙, 한 명의 단장 아래 묶인 무리라는 틀은 베르나르의 말대로 그 전 시대에 없던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시작한 무리가 성을 짓고 함대를 꾸리기까지, 기사단은 200년 가까운 사이에 모습을 크게 바꿨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1차 십자군: 왜 유럽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갔나: 이 글의 출발점인 1099년 예루살렘 함락까지의 길을 다룹니다.
- 살라딘과 3차 십자군: 하틴에서 아르수프까지: 기사단이 함께 싸운 12세기 말의 전쟁을 다룹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무기와 조직이 시대마다 어떻게 바뀌었는지 20세기 이후의 흐름으로 이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