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년 10월 25일, 크림반도 발라클라바 근처의 골짜기에서 영국 경기병 여단 673명이 러시아 포대를 향해 말을 몰았습니다. 명령은 짧았고, 어느 대포를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몇 주 뒤 이 돌격은 테니슨의 시가 됐고, 지금도 크림 전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이 전쟁이 남긴 것은 돌격 장면만이 아닙니다. 전쟁터 소식이 전보와 신문 기사와 사진으로 고국에 닿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는 한 간호사가 죽은 병사를 세어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크림 전쟁이 왜 일어나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리고 전신과 사진과 통계가 이 전쟁에서 무엇을 바꿨는지 따라가 봅니다.
왜 크림반도였나
1850년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오스만 제국을 "병자"라고 불렀습니다. 흔히 쓰는 "유럽의 병자"에서 "유럽의"는 몇 해 뒤에 붙은 말입니다. 1853년 초 그는 멘시코프 공을 오스만 정부에 보내, 제국 안의 정교회 신자 1,200만 명에 대한 러시아의 주권을 요구했습니다.
러시아는 곧 군대를 움직여 다뉴브 강가의 두 공국,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침공했습니다. 오늘의 루마니아 땅입니다. 오스만 제국은 1853년 10월 선전 포고했고, 11월 30일 흑해 남쪽 시노프(Sinop)에서 러시아 함대가 오스만 함대를 쳐부쉈습니다. 영국 관보는 이 싸움을 역사상 가장 일방적인 해전 가운데 하나로 적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1854년 3월 28일 술탄 편에서 선전 포고했습니다. 두 나라는 기울어 가는 오스만 제국을 떠받치고 근동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막고 싶어 했습니다. 프랑스 쪽 말도 남아 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1854년 3월 2일 의원들 앞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콘스탄티노플로 끝없이 뻗지 않게 하는 데 프랑스도 영국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해가 걸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싸움은 처음부터 크림에서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1854년 6월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흑해 서쪽 바르나(Varna)에 모였습니다. 그해 여름 러시아군이 실리스트리아에서 오스만군에 졌고, 오스트리아의 압력까지 받아 공국에서 물러났습니다. 바르나의 연합군은 할 일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영국 정부는 국내 여론의 영향을 받아 크림반도의 러시아 해군 기지 세바스토폴(Sevastopol)을 치기로 했고, 프랑스도 동의했습니다. 사르데냐 왕국은 1855년 프랑스의 호의를 얻으려 연합군에 합류했습니다.
전쟁터가 크림 하나였던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에서 오스만군과 싸워 대체로 이겼고, 영국·프랑스 함대는 발트해에서도 움직였습니다. 그래도 영국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곳은 크림이었습니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한 장의 연표
이 전쟁을 언제부터 세는지는 기관마다 다릅니다. 영국 관보 The London Gazette는 1853년 10월 16일부터 1856년 3월 30일까지로, 과학박물관(Science Museum)은 1853~1856년으로 적습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 NAM)은 1854~56년으로 셉니다. 다뉴브의 러시아·오스만 전쟁은 1853년에, 영국과 프랑스의 참전은 1854년에 시작됐으니 어느 쪽을 출발점으로 잡느냐에 따라 해가 갈립니다.
1854년 9월 14일 연합군이 크림 서북쪽 칼라미타 만에 내렸습니다. 18일까지 프랑스군 3만, 영국군 2만 6,000, 튀르키예군 4,500명이 상륙했습니다. 9월 20일 알마(Alma) 강에서 연합군이 고지의 러시아 진지를 공격했고, 러시아군은 5,000명을 잃고 물러났습니다. 연합군의 손실은 3,000명이었습니다.
세바스토폴로 가는 길이 열렸지만, 연합군은 도시의 방어가 약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도시를 돌아 남쪽에서 포위하기로 하고 발라클라바와 카미에시 항을 기지로 삼았습니다. 그사이 러시아는 요새를 보강했고, 10월 17일 시작된 첫 포격을 잘 견뎠습니다. 포위는 이듬해 9월까지 이어집니다.
11월 5일 러시아군은 인케르만(Inkerman)의 영국 진지를 새벽에 기습했습니다. 짙은 안개 속의 혼란스러운 싸움이었고, 영국 보병이 버티는 사이 프랑스 증원군이 도와 연합군이 이겼습니다. NAM은 영국군 전사자를 2,500명, 프랑스군을 1,700명, 러시아군의 손실을 1만 2,000명으로 적습니다.
1855년 6월 18일 영국군은 레단(Redan)이라는 거점을 공격했습니다. 탁 트인 땅 250야드를 포화 속에 건너다 1,500명 넘는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습니다. 9월 8일 두 번째 공격에서도 영국군은 레단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프랑스군이 말라코프(Malakoff) 보루를 차지하자 러시아군은 세바스토폴을 버렸습니다.
나폴레옹 재단(Fondation Napoléon)에 실린 이브 브륄레(Yves Bruley)의 글은 그날을 프랑스 쪽에서 그립니다. 9월 5일부터 강한 포격이 이어졌고, 8일 정오에 포격이 멎자 돌격 신호가 울렸습니다. 오래 승부를 알 수 없던 하루는 마크마옹 장군이 말라코프 탑을 차지하며 끝났고, 러시아의 고르차코프 장군은 도시를 북쪽으로 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1855년 10월에는 킨부른도 연합군 손에 떨어졌습니다.
발라클라바와 경기병 여단
1854년 10월 25일 러시아군 약 2만 5,000명이 영국의 보급항 발라클라바 쪽으로 밀고 들어와 튀르키예군이 지키던 보루 몇 곳을 빼앗았습니다. 러시아 기병이 항구로 다가가자 콜린 캠벨이 이끄는 93 하일랜드 연대가 길을 막았습니다. 기병을 맞는 보병은 보통 네 줄 깊이의 방진을 짰지만, 이들은 두 줄로 섰습니다. 두 번의 일제 사격에 러시아 기병은 돌아섰고, 이 장면이 "가는 붉은 선(thin red line)"으로 남았습니다.
이어 영국 중기병 여단 800명이 3,000명의 러시아 기병을 향해 오르막으로 돌격했습니다. 속도는 빠른 걸음보다 조금 빠른 정도였고 돌격은 10분 남짓이었지만, 러시아 기병을 흐트러뜨렸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전장을 보던 영국군 사령관 래글런(Lord Raglan)은 러시아군이 빼앗은 대포를 끌고 가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가 보낸 명령문은 "기병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 적을 따라가고, 적이 대포를 가져가지 못하게 하라"였고, NAM은 이 명령을 느슨하게 쓰인 것으로 봅니다.
골짜기 아래의 기병 지휘관들은 래글런처럼 전장을 내려다볼 수 없어 어느 대포를 말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 눈에 보인 것은 골짜기 끝의 러시아 포대뿐이었습니다.
경기병 여단은 엉뚱한 포대를 향해 달렸습니다. 세 방향에서 포화를 맞으며 골짜기를 지났고, 일부는 골짜기 끝 포대까지 닿았습니다. 프랑스 아프리카 엽기병(Chasseurs d'Afrique)의 돌격이 살아남은 이들의 철수를 도왔습니다.
손실은 같은 박물관 안에서도 조금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NAM의 크림 전쟁 쪽은 673명 가운데 247명이, 발라클라바 전투 쪽은 약 260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적고, 뒤쪽은 말 475마리를 잃었다고 덧붙입니다. 전투는 전략적 교착으로 끝났습니다. 발라클라바는 연합군 손에 남았지만 러시아군이 고지와 길을 쥐었고, 그 탓에 다가올 겨울의 포위군 보급이 훨씬 어려워졌습니다.
이 패배가 오래 기억되는 데에는 몇 주 뒤에 나온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시 「경기병 여단의 돌격」이 큰 몫을 했습니다. 테니슨은 몇 해 뒤, 가난하게 사는 참전 군인을 도울 돈을 모으려고 「중기병 여단의 돌격」도 썼습니다. 시는 시이고, 명령문과 손실 기록은 따로 읽어야 합니다.
겨울, 길, 보급: 무너진 것과 고친 것
1854년 11월 14일 큰 폭풍이 크림을 덮쳤습니다. 세바스토폴 앞 진영의 천막이 무너졌고, 겨울옷과 말먹이를 싣고 온 증기선 프린스(Prince) 호가 부서졌습니다. 의약품과 식량, 옷을 실은 배 30척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말먹이를 잃은 수송용 동물은 추위와 굶주림에 쓰러졌습니다. 겨울이 오자 발라클라바와 세바스토폴을 잇는 흙길은 진창이 됐고, 바퀴 달린 수레가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가장 심할 때 병사들은 보급품을 받으러 발라클라바까지 왕복 19 km를 걸었습니다. 참호에서는 식량, 겨울옷, 천막, 의약품, 취사용 연료가 모두 모자랐고, 1855년 2월 영국군에서 싸울 수 있는 병력은 1만 2,000명으로 줄었습니다.
부상자를 옮기는 길도 막혔습니다. 배의 자리가 모자라 영국군은 구급차를 몇 대만 가져왔고, 그마저 끌 동물이 죽어 갔습니다. 프랑스군의 노새를 빌리거나 기병의 말로 환자를 나르기까지 했습니다. 흑해 건너 스쿠타리(Scutari) 병원에 닿은 환자가 몇 주씩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NAM은 영국의 해외 원정 거의 모두가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짚습니다. 달라진 것은 이번에는 종군 기자가 그 모습을 고국에 보냈다는 점입니다.
파머스턴(Palmerston)의 새 내각은 조사 위원회를 세웠습니다. 보고서는 포장된 길이 없던 것도 한 원인으로 꼽으면서, 장비와 물자를 제대로 대지 않은 정부와 물자 배분을 늦춘 고위 장교들을 함께 비판했습니다. 정부는 군 행정을 다시 짜고 육상 수송대(Land Transport Corps)를 계획했으며, 발라클라바에 철도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조치와 봄이 겹치면서 보급은 차츰 나아졌습니다.
두 번째 겨울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스군이 병으로 크게 줄었고, 옷과 숙소와 장비를 갖춘 영국군은 앞 겨울의 고통을 겪지 않았습니다.
전신과 신문: 소식이 빨라진 전쟁
과학박물관은 크림 전쟁을 철도, 전신선, 사진, 고폭탄의 시대에 벌어진 근대의 첫 고기술 분쟁으로 부릅니다. 그렇다고 첫날부터 전쟁터와 런던이 전선 한 가닥으로 이어져 있던 것은 아닙니다.
소식은 두 갈래로 영국에 왔습니다. 하나는 전보였고, 다른 하나는 손으로 쓴 공문이었습니다. 공문에는 사상자 명부까지 붙었고, 믿을 만한 장교가 런던의 전쟁부나 해군부까지 직접 들고 갔습니다. 두 가지 모두 관보에 실렸습니다.
1855년 3월의 공문 하나가 그 시절의 속도를 보여 줍니다. 래글런은 3월 10일 자 공문에 6일 저녁 전보 한 통을 받았다고 적었습니다. 베를린에서 2일 자로 보낸 것으로, 그날 정오 러시아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날짜로 세면 베를린에서 크림의 사령부까지 나흘이 걸렸습니다. 래글런의 이 공문은 3월 24일 관보에 실렸으니, 쓴 날부터 인쇄까지는 14일이었습니다.
흑해 밑으로 전신선을 놓는 일도 이 무렵 진행됐습니다. 영국 왕립박물관 그리니치(Royal Museums Greenwich)의 문서고에는 R.S. Newall & Co.가 1854년 12월 9일에 낸 바르나~발라클라바 전신 부설 제안서가 남아 있습니다. 1855년 4월 14일 래글런은 해저 전신선이 켈레그라 곶에서 "수도원"까지 무사히 놓였다고 보고했습니다. 공병들이 선을 바르나 근처까지 이어 갈 것이고, 1주일이나 열흘 안에 쓸 수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5월에는 전보가 한 사람의 안부도 실어 날랐습니다. 1855년 5월 발라클라바에 간 나이팅게일이 "크림 열병"으로 쓰러졌고, 래글런은 5월 24일까지 그녀가 위험을 넘겼다고 런던에 전보로 알릴 수 있었습니다.
신문도 달라졌습니다. 『타임스(The Times)』 편집장 딜레인은 1854년 2월 윌리엄 하워드 러셀(William Howard Russell)을 근위 여단과 함께 떠나보냈습니다. NAM은 러셀 같은 이들을 세계 첫 진짜 종군 기자로 봅니다. 러셀이 보낸 군의 결함에 관한 기사는 큰 여론을 일으켰고, 그 여론 끝에 애버딘(Aberdeen) 내각이 무너졌습니다.
읽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과 투표권을 가진 사람이 늘면서 소식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고, 전신 같은 새 기술은 정확하고 새로운 소식에 대한 요구를 키웠습니다. 삽화 신문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는 전쟁 동안 독자가 주 10만에서 20만으로 두 배가 됐고, 1854년 11월에는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문이 됐습니다. 1855년 "지식세"라 불리던 신문세가 없어지자 싼 신문도 크게 늘었습니다.
관보도 이 흐름의 한쪽에 있었습니다. 관보의 공문 게재와 다른 매체의 보도가 합쳐져, 크림 전쟁은 일반 대중이 제때 정확한 소식을 받아 본 첫 근대 전쟁 가운데 하나로 여겨집니다.
사진기를 실은 마차
이 무렵 사진은 갓 걸음마를 뗀 기술이었습니다. 1851년 스콧 아처가 내놓은 습판(wet-plate) 방식이 앞선 방식들을 밀어냈지만, 사진가는 여전히 암실을 가는 곳마다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사진기는 크고 무거웠고, 노출 시간이 길어 움직이는 장면은 찍을 수 없었습니다.
NAM이 소장한 1855년 사진 한 장에는 로저 펜턴(Roger Fenton, 1819~69)의 사진 마차와 그 위에 앉은 조수 마커스 스팔링이 보입니다. 펜턴은 영국 왕립사진협회(Royal Photographic Society)의 창립 회원이었고, 크림 전쟁 사진가로 가장 잘 기억됩니다.
그의 크림 사진은 상업적·공식 후원자의 영향과 힘든 현지 조건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NAM은 그 기록의 질과 폭을 높이 삽니다. 인물과 풍경이 있고, 사람들을 연극 무대처럼 세워 찍은 "활인화(tableau vivant)" 구성도 있습니다.
오스만 제국 조폐국의 수석 조각가였던 제임스 로버트슨(James Robertson)도 크림 전쟁 사진을 남겼습니다. 그는 주로 풍경을 찍었고, 세바스토폴 포위가 끝날 무렵 그 자리에서 부서진 요새들을 찍었습니다.
사진이 곧바로 신문 지면을 채운 것은 아닙니다. 전쟁 동안 신문은 기자와 함께 화가를 전쟁터에 보냈고, 지면에는 그림이 실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인쇄 기술이 나아지면서 그림이 줄고 사진이 늘었습니다.
나이팅게일과 숫자로 그린 그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은 신문에 실린 병사들의 고통을 읽고 정부의 간호사 모집에 응했습니다. 1854년 10월 21일 간호단과 함께 런던을 떠나 11월 3일 콘스탄티노플에 닿았고, 과학박물관은 이 간호단을 38명으로 적습니다. 스쿠타리 병원은 더러웠고 기본 장비도 모자랐습니다. 남자 군의관들은 처음에 간호단을 반기지 않았지만, 11월 인케르만의 부상자가 몰려오자 도움을 받아들였습니다.
간호단은 병실의 의료·위생 상태를 손보고, 조리장을 차리고, 침구와 옷을 빨았습니다. 병사 대신 집에 편지를 써 주고 읽을거리 방도 열었습니다.
그래도 사망률은 곧바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1855년 2월 이 병원의 사망률은 42%까지 올랐습니다. NAM은 나이팅게일이 그 원인을 위생이 아니라 영양 부족으로 잘못 봤다고 적습니다. 환기가 안 되는 병원 건물은 망가진 하수도 위에 서 있었고, 사망률은 위생 위원회가 하수도를 고치고 환기를 낫게 한 뒤에야 떨어졌습니다.
이 위원회는 서덜랜드(John Sutherland) 박사와 개빈 박사, 위생 기술자 롤린슨(Robert Rawlinson)으로 꾸려져 1855년 3월 콘스탄티노플에 닿았습니다. 위원회와 나이팅게일 간호단의 일이 함께, 몇 주 만에 스쿠타리 병원의 사망률을 절반으로 줄이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병원이 달라진 데에는 간호단과 위원회의 일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이 남긴 또 하나의 일은 숫자였습니다. 그녀가 왔을 때 스쿠타리에서는 죽은 사람 수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자료를 모아 분석한 그녀는, 전선의 병원에 머문 병사(사망률 12.5%)가 스쿠타리로 옮겨진 병사(37.5%)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1856년 8월 영국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그림 하나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극좌표 면적 도표(polar area diagram)라 불리는 이 그림에서 쐐기 하나는 한 달이고, 쐐기의 넓이가 그달 죽은 병사 수입니다. 파랑은 막을 수 있었던 병, 빨강은 전장의 상처, 검정은 그 밖의 원인입니다. 도표의 오른쪽은 그녀가 도착한 뒤의 1854~5년, 왼쪽은 병원과 간호의 개혁을 한 뒤의 1855~6년입니다.
그림을 보면 두 가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개혁 뒤에 죽음이 크게 줄었다는 것, 그리고 전쟁 동안 상처보다 막을 수 있던 병으로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통계학자 대부분은 숫자 표를 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통계 훈련을 받지 않은 의원과 관리, 장교가 문제의 크기를 바로 알아보게 하려고 그림을 골랐습니다.
그녀는 통계학회(지금의 왕립통계학회)의 첫 여성 회원이 됐는데, 그 해를 NAM은 1859년, 과학박물관은 1858년으로 적습니다. 1860년 7월 9일에는 나이팅게일 기금으로 세인트토머스 병원에 간호 학교를 세웠습니다.
같은 전쟁터에는 자메이카 출신의 메리 시콜(Mary Seacole)도 있었습니다. 1854년 말 런던에서 군 간호사로 자원했지만 전쟁부와 나이팅게일에게 거절당하자, 제 돈으로 뱃삯을 내고 전쟁터로 갔습니다. 그녀는 자주 말을 타고 나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약과 음식을 나눠 주었습니다.
파리 조약과 남은 것
세바스토폴을 잃은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연합군 편으로 참전하겠다고 위협하자 강화에 응했습니다. 1856년 2월 파리의 케도르세(Quai d'Orsay)에서 강화 회의가 열렸고, 3월 30일 파리 조약이 서명됐습니다. 조약은 튀르키예의 독립을 보장하고, 흑해를 중립 지역으로 만들어 모든 군함에 닫았습니다. 러시아는 다뉴브 강어귀의 베사라비아를 내놓았습니다.
NAM은 흑해와 다르다넬스의 중립화를 남쪽의 따뜻한 바다에 해군 항구를 두려던 러시아의 꿈에 대한 타격으로 봅니다. 조약은 한 달 안에 비준됐습니다.
희생은 컸습니다. 영국 관보는 오스만·프랑스·영국·사르데냐 동맹의 병사 약 25만 명이 죽었고, 러시아 제국에서는 약 5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습니다. 러시아 쪽의 죽음은 주로 병과 방치에서 왔습니다.
전쟁 중에 새로 생긴 것도 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크림 전쟁에서 싸운 이들의 용기를 기리려 빅토리아 십자 훈장(Victoria Cross)을 만들었습니다. 계급과 상관없이 적 앞에서 용기를 보인 군인에게 주는 훈장으로, 1856년 2월 5일 관보에 발표됐습니다.
이 전쟁을 보는 눈도 바뀌어 왔습니다. 브륄레는 프랑스 제3공화정 시기의 역사학이 크림 전쟁을 하찮은 이유로 일어난 변호하기 어려운 전쟁으로 보곤 했지만, 오늘은 역사가들의 연구로 더 잘 알려지고 더 잘 이해된다고 적습니다. 영국 쪽에서는 이 원정이 군사·보급의 무능과 병사들의 용기·인내를 함께 상징한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유럽사의 긴 줄에서 보면 크림 전쟁은 큰 평화 사이에 낀 전쟁이었습니다. NAM은 워털루 전투가 1914년까지 이어진 유럽의 전반적인 평화를 열었고, 크림 전쟁이 그 평화를 짧게 끊었다고 적습니다. 영국 육군에게는 1816년부터 1914년 사이에 치른 유일한 유럽의 큰 전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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