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세계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렸습니다. 미국에서는 전문가도 시민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국 여론에 미친 효과를 "진주만"에 빗댄 기록까지 남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미국이 그렇게 뒤처져 있었을까요?

냉전의 군비 경쟁은 이런 두려움과 추측을 먹고 자랐습니다. 처음에는 폭격기, 그다음은 미사일, 그리고 위성이 무대였습니다. 이 글은 1949년부터 1991년까지 무대가 어떻게 옮겨 갔는지, "격차"라는 말이 어디서 나와 어떻게 사라졌는지, 위기 뒤에 어떤 조약이 이어졌는지를 미국 정부와 유엔의 공개 기록으로 따라갑니다.

냉전 군비 경쟁 연표 도표. 첫 줄 1947~1956년 폭격기 시대: 1947년 봉쇄 정책(케넌), 1949년 8월 29일 소련 첫 핵실험, 1950년 4월 7일 NSC-68 보고서와 미국의 큰 증강, 1952년 11월 1일 미국 첫 수소폭탄 시험, 1955년 11월 소련 첫 열핵 시험, 1956년 7월 4일 U-2의 첫 모스크바 상공 비행. 둘째 줄 1957~1963년 미사일·위성·위기: 1957년 8월 소련 첫 ICBM 시험, 10월 4일 스푸트니크 1호, 1958년 1월 31일 익스플로러, 10월 1일 NASA 출범, 1960년 5월 1일 U-2 격추, 8월 18일 코로나 첫 성공,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1963년 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 셋째 줄 1967~1991년 조약과 끝: 1967년 우주 조약, 1968년 7월 1일 핵확산금지조약 서명, 1972년 5월 26일 ABM 조약과 SALT I, 1979년 6월 17일 SALT II 서명(비준 안 됨), 1983년 3월 23일 레이건의 미사일 방어 연설, 1991년 7월 START 서명, 1991년 12월 25일 소련 깃발 내림. 점 사이 간격은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고 무기 성능 수치는 없다
핵 독점이 깨진 해부터 소련이 사라진 날까지. 미 국무부·에너지부·CIA·NASA·유엔 자료의 날짜를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독점이 깨진 해

미국과 소련의 사이는 2차 대전 전부터 좋지 않았습니다. 미 에너지부(DOE)의 역사 자료는 그 뿌리를 1917년 러시아 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쟁 중에는 같은 편이었지만 의심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핵무기를 국제적으로 어떻게 통제할지가 문제가 됐습니다. 미국은 소련군이 서유럽을 위협한다고 봤고, 자기 재래식 병력은 빠르게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충분한 통제 장치 없이는 핵 독점을 내놓지 않겠다는 쪽에 섰습니다.

독점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습니다. 소련은 1949년 8월 29일 첫 핵실험을 했습니다. 미국 정보 당국은 대체로 소련이 1952년이나 그 뒤에야 폭탄을 가질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미국의 큰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외교관 조지 케넌(George F. Kennan)이 1947년 익명의 글에서 내놓은 "봉쇄"입니다. 그는 소련의 팽창을 오래, 참을성 있게, 그러나 굳건히 막아야 한다고 썼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이 봉쇄가 냉전 내내 미국의 기본 전략이었다고 정리합니다.

폭격기의 시대와 큰 증강

1950년 4월 7일, 국무부 정책기획실이 1급 비밀 보고서 하나를 마쳤습니다. NSC-68입니다. 보고서는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함께 크게 늘려야 소련을 억제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반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국방장관 루이스 존슨, 소련 전문 외교관 케넌과 볼런은 미국이 이미 상당한 군사적 우위에 있다고 봤습니다. 논쟁을 끝낸 것은 1950년 6월 북한의 남한 침공이었습니다. 트루먼 행정부는 1950~1953년 국방비를 국내총생산 대비 5%에서 14.2%로, 거의 세 배로 늘렸습니다.

이때 핵무기를 실어 나를 수단은 폭격기였습니다. 독일과 일본 도시의 폭격을 지휘했던 미 공군 장성들은 미국 도시가 같은 일을 겪지 않게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폭탄 자체도 바뀌었습니다. 미국은 1952년 11월 1일 첫 수소폭탄을 시험했고, 소련은 1953년 8월 "증폭 핵분열" 무기를, 1955년 11월 첫 열핵무기를 시험했습니다.

상대의 폭격기는 몇 대나 될까요? 1950년대 미국은 소련 전략폭격기를 자주 목격했지만 전체 배치를 한눈에 볼 수단이 없었습니다. CIA는 당시 정보 당국이 소련의 폭격기와 미사일 생산을 크게 부풀려 추정했고, 이것이 이른바 "폭격기 격차"와 "미사일 격차"였다고 적었습니다.

경쟁의 무대가 옮겨 간 흐름을 네모 세 개와 화살표로 그린 개념도. 첫째 네모 폭격기(1950년대 초부터): 공군 지휘부가 미국 도시가 독일·일본 도시처럼 되지 않게 하려 했고, 소련 폭격기가 자주 목격되며 그 수의 추정이 커졌다(폭격기 격차). 둘째 네모 미사일(1957년부터): 1957년 8월 소련 첫 ICBM 시험, 1958년 미국 ICBM의 제한된 운용 시작, 1960년 미국 선거를 흔든 미사일 격차의 두려움, MAD라는 말. 셋째 네모 위성(1957년부터): 1957년 10월 스푸트니크 1호, 1960년 8월 코로나 첫 성공, 뒤에 사진 위성이 조약 검증을 도움(국가 기술 수단). 아래 띠에는 1963년 부분 핵실험 금지, 1967년 우주, 1968년 핵확산금지, 1972년 ABM과 SALT I 조약이 뒤따랐다고 적혀 있다. 기체 모양·사거리·위력은 그리지 않았다
새 무대가 생겨도 앞의 무대는 남았습니다. 경쟁이 겹겹이 쌓인 모양입니다 (도표)(도표)

미사일과 스푸트니크

1957년 8월, 소련이 세계 첫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했습니다. 두 달 뒤 스푸트니크 1호가 그 사실을 온 세계에 극적으로 보여 줬습니다. 이듬해 미국도 자기 ICBM의 제한된 운용을 시작했습니다. 로켓 하나가 우주발사체도 되고 미사일도 되는 까닭은 ICBM 글에서 다룹니다.

미국은 서둘렀지만 첫걸음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957년 12월 미국의 첫 위성 뱅가드는 발사대에서 폭발했고, 1958년 1월 31일에야 익스플로러가 궤도에 올랐습니다. NASA는 1958년 10월 1일 일을 시작했습니다. 스푸트니크가 만든 것은 "기술 격차의 착각"이었고, 그 착각이 항공우주 지출과 과학 교육, 새 연방 기관을 낳았다는 것이 NASA 역사실 글의 평가입니다.

1950년대 말 흐루쇼프는 소련의 ICBM 비축이 늘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미사일 격차"가 1960년 대통령 선거의 쟁점이 됐고, 케네디는 이 주장을 내세워 선거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취임한 뒤 케네디 행정부는 핵 균형이 여전히 미국 쪽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미사일 시대의 무서움은 한번 발사되면 막을 길이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한쪽이 공격하면 다른 쪽이 반드시 보복한다는 약속만이 균형을 지킨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른바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의 시대입니다.

하늘 위의 눈: U-2에서 코로나 위성까지

상대의 무기를 세려면 상대의 땅을 봐야 합니다. 1955년 제네바에서 아이젠하워는 서로의 상공을 날며 핵시설과 발사대를 살피자는 "열린 하늘"을 제안했지만 흐루쇼프가 거절했습니다. 흐루쇼프가 ICBM을 많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자 미국은 소련의 핵 개발을 확인할 새 방법을 더 찾게 됐습니다.

CIA가 운용한 U-2 정찰기는 1956년 7월 4일 처음으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위를 날았습니다. 1956~1960년 소련 상공을 24번 날며 찍은 사진은 작은 틈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그 틈은 ICBM 기지를 하나도 찾기 전에 닫혔습니다. 1960년 5월 1일 U-2 한 대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됐고, 파리 정상회담이 취소됐습니다.

그다음 눈은 우주에 있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1958년 2월 정찰위성 사업 코로나(CORONA)를 승인했습니다. 겉으로는 "디스커버러"라는 과학 연구 사업으로 알려졌습니다. 처음 13번의 임무는 쓸 만한 사진을 한 장도 돌려보내지 못했습니다.

1960년 8월 18일, 14번째 임무가 처음으로 모든 단계를 해냈습니다. 그 한 번의 임무가 앞선 U-2 비행 전부를 합친 것보다 넓은 소련 땅을 찍었습니다.

몇 달 안에 CIA 사진 판독관들은 미사일 격차와 폭격기 격차를 모두 걷어 냈습니다. 소련은 쓸 만한 ICBM 개발에서 오히려 미국에 뒤처져 있었고, 폭격기를 늘리고는 있었지만 자원 대부분을 미사일 생산에 쓰고 있었습니다. 우주에서 정보를 얻는 원리는 군사 정찰위성 글에서 이어집니다.

폭격기 격차와 미사일 격차가 사라진 과정을 위에서 아래로 다섯 칸에 그린 도표. 1950년대: 소련 폭격기와 미사일 시험은 보이지만 전체 전력은 보이지 않아 추정이 크게 부풀었다. 1956~1960년: U-2 24번의 비행 사진이 작은 틈을 열었지만 ICBM 기지 하나 찾기 전에 닫혔고, 1960년 5월 1일 U-2가 격추됐다. 1958년 2월: 코로나 승인, 겉으로는 디스커버러 연구 사업, 처음 13번은 쓸 만한 사진이 없었다. 1960년 8월 18일: 14번째 임무가 앞선 U-2 비행 전부보다 넓은 소련 땅을 찍었다. 몇 달 안에: 두 격차가 모두 걷혔다. 소련은 쓸 만한 ICBM에서 뒤처져 있었고 폭격기도 늘렸지만 자원 대부분을 미사일에 쓰고 있었다. 카메라·궤도 성능 수치는 없다
추측에서 사진으로. CIA 코로나 쪽에 적힌 순서입니다 (도표)(도표)

벼랑 끝에서 조약으로

1962년 10월은 미국 국무부 역사실이 두 초강대국이 핵 충돌에 가장 가까이 간 순간이라고 부르는 때입니다. 10월 14일 U-2가 쿠바에 짓고 있던 미사일 기지를 찍었습니다. 10월 22일 케네디는 쿠바 바다를 막는 "격리"를 명령했습니다. 10월 28일 흐루쇼프는 미사일을 해체해 가져가겠다고 발표했고, 미국의 주피터 미사일은 이듬해 4월 터키에서 빠졌습니다.

위기는 두 가지를 남겼습니다. 하나는 서로의 뜻을 잘못 읽지 않도록 백악관과 크렘린을 잇는 직통선, "핫라인"입니다. 다른 하나는 조약입니다.

1963년 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은 대기권과 우주, 물속의 핵실험을 모두 금지했습니다. 대기권 시험의 낙진이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세계 곳곳에서 커진 뒤였습니다.

이 조약이 핵무기 개발과 확산을 실제로 크게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다음 조약들의 선례가 됐습니다. 1967년 1월 서명이 시작된 우주 조약은 그해 10월 발효됐고, 핵무기를 위성처럼 우주에 올려 두는 일을 막았습니다. 1968년 7월 1일에는 미국·영국·소련과 59개 나라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했고, 조약은 1970년 3월 발효됐습니다.

1972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ABM 조약과 SALT I 잠정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냉전에서 처음으로 두 나라가 핵미사일 수를 제한하기로 한 것입니다. ABM 조약은 미사일 방어를 각자 요격기 200기, 방어 기지 두 곳으로 묶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국방장관 맥나마라는 상대의 확대에 확대로 맞서는 길을 "미친 길"이라고 불렀습니다.

협상 테이블에는 소련이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을 계속 늘린다는 미국의 걱정도 올랐습니다. 바닷속에서 미사일이 어떻게 출발하는지는 SLBM 글에서 다룹니다.

조약은 지켜지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SALT II 협상에서 두 나라는 원격 측정 신호 수집과 사진 정찰위성 같은 "국가 기술 수단"으로 검증하기로 했습니다. 몰래 보던 위성이 이제 조약을 받치는 눈이 된 셈입니다. SALT II는 1979년 6월 17일 빈에서 서명됐지만 비준되지 않았고, 두 나라는 그 뒤에도 조건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1980년대와 경쟁의 끝

1983년 3월 23일, 레이건 대통령은 국민에게 한 연설에서 소련 미사일의 위협에 방어 수단으로 맞서는 사업을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날아오는 전략 탄도미사일을 가로막는 탄도미사일 방어(ballistic missile defense, BMD)를 겨냥한 것입니다. 그는 ABM 조약의 의무에 맞게 장기 연구개발 계획을 정하라고 지시했고, 수년, 아마 수십 년이 걸릴 일이라고 했습니다. 레이건은 이 전략방위구상(SDI) 연구가 1972년 ABM 조약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탄도미사일을 레이저로 막으려던 뒤의 시도, 공중 레이저(ABL) 이야기는 레이저 무기의 역사에서 이어집니다.

1991년 7월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START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25일, 크렘린에서 소련 깃발이 마지막으로 내려갔습니다.

남은 핵무기는 새로운 걱정거리가 됐습니다. 1991년 11월 넌-루거 법이 협력적 위협 감소 사업을 만들어 옛 소련의 무기 해체에 돈을 댔습니다.

남긴 것과 엇갈리는 평가

1961년 1월 17일, 떠나는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고별 연설에서 "군산복합체"를 경고했습니다. 미국이 "거대한 규모의 상설 군수 산업"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인정하면서, 그 산업이 정부 안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얻지 않게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차 대전의 영웅이 늙은 군인의 향수 어린 작별을 하리라 기대했던 사람들은 이 강한 경고에 놀랐습니다.

경쟁이 세계 대전으로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두 초강대국은 한국,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서 대리전으로 맞섰습니다. DOE 역사는 이 "승리"가 값싸지 않았고, 그 전쟁들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으며, 결과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도 않았다고 적습니다. 같은 자료는 40년의 비싼 군비 경쟁 끝에 1980년대 소련 경제가 무너졌다고 해석합니다.

봉쇄를 어떻게 할지를 두고도 생각이 갈렸습니다. 니츠는 소련의 위협을 주로 군사로 봤고, 케넌은 주로 정치로 봐서 경제 원조를 앞세웠습니다. 1950년에는 니츠의 생각이 이겼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케넌의 봉쇄가 너무 방어적이라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경쟁은 뜻밖의 기록도 남겼습니다. 코로나는 운용 기간 동안 80만 장이 넘는 사진을 모았고, 1995년 2월 24일 행정명령 12951로 공개됐습니다. 그 자리에서 고어 부통령은 위성 감시가 군비통제 협정을 추진할 자신감을 줬고, 위성이 냉전의 풍경보다 훨씬 많은 것을 기록했다고 말했습니다. 지구 환경의 옛 모습까지 다음 세대를 위해 기록해 뒀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경쟁의 무게는 미사일 기지 주변의 사람들도 짊어졌습니다. 사우스다코타 서부의 미니트맨 미사일 국립 사적지는 이 지역 가족들이 말 그대로 뒷마당에 핵무기를 두고 사는 법을 배웠다고 소개합니다. 미 국립공원청의 표현으로, 냉전은 양쪽을 다 무너뜨릴 수 있는 핵 군비 경쟁이었지만 불안한 평화를 지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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