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24일 오후, 흥남 항구의 부두와 크레인이 폭약에 무너졌습니다. 마지막 부대를 태운 배들이 항구를 빠져나가던 때였습니다. 그보다 두 주쯤 앞서부터 이 항구에서는 군인 10만여 명과 차량, 물자가 배에 실렸고, 집을 떠나온 피란민 9만여 명도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군대는 왜 육지가 아니라 바다로 물러났을까요? 그리고 피란민은 어떻게 군함과 상선에 오르게 되었을까요? 실마리는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HHC)의 기록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에 남아 있습니다. 두 기록은 큰 줄기가 같지만, 숫자와 날짜는 조금씩 다릅니다.

NHHC 쪽 기록은 전투를 정리한 개요 쪽과, 사령부 소장이 쓰는 해설 글 H-Gram(이 글에서는 056호와 그 첨부 글 H-056-1)으로 나뉩니다. H-Gram에는 지은이의 해석이 섞여 있고, 백과 항목에도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라는 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왜 바다로 빠져야 했나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뒤 유엔군은 북쪽으로 빠르게 올라갔습니다. 맥아더는 그해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고, 미군 사이에는 "크리스마스 전에 집으로"라는 기대가 퍼졌습니다. 그런데 10월 19일부터 중국군이 밤을 틈타 들키지 않고 북한으로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11월 말 중국군 공세의 규모가 드러나자 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위험해졌습니다. 11월 30일 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모든 부대에 물러나 흥남 바로 안쪽의 큰 도시인 함흥에 모이라고 지시했습니다. 장진호의 부대는 하나뿐인 보급로를 따라 싸우며 항구 쪽으로 내려와야 했습니다.

육로로 남쪽까지 갈 수는 없었을까요? 서쪽의 제8군은 육로로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동쪽의 제10군단은 원산 지역이 중국군에게 넘어가면서 남쪽 길이 막혔습니다. 남은 길은 바다였습니다.

처음에 맥아더는 함흥·흥남에 모여 겨울을 버틸 수 있다고 보았고, 현지 지휘관들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12월 1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제10군단을 철수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12월 7일 도쿄 회의에서는 제10군단을 배에 태워 남한 서해안으로 돌려 보내 서울 방어를 돕는 안이 논의되었고, 합참이 이를 승인했습니다. 한국 쪽 백과 기록으로는 맥아더의 철수 명령이 12월 9일에 내려졌습니다.

거꾸로 한 상륙 작전

흥남 철수는 짧은 예고로 치른 큰 군수(logistics) 작전이었고, 상륙 작전을 거꾸로 돌린 것과 같았습니다. 상륙 작전이 바다에서 해안으로 사람과 짐을 올린다면, 이번에는 해안의 사람과 짐을 배로 거둬들여야 했습니다. 세 항구로 들어왔던 부대와 육로로 온 부대가 모두 항구 하나로 빠져나가야 했다는 점도 달랐습니다.

계획 규모는 11만~12만 명, 차량 1만 5,000대, 물자 40만 톤 이상이었습니다. 겨울 공세를 위해 쌓아 둔 탄약과 항공유도 여기에 들어 있었습니다. 한 번에 실을 배도, 부두도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화물선은 흥남과 부산 사이를 여러 번 오갔습니다.

흥남 철수를 거꾸로 한 상륙 작전으로 그린 개념 도표. 왼쪽 세 상자(장진호에서 길 하나로 싸우며 내려온 부대, 다른 항구와 길로 들어왔던 부대, 부대를 따라온 피란민)에서 화살표가 가운데 '항구 하나: 흥남' 상자로 모인다. 그 상자에는 줄어드는 방어선이 항구를 지키는 동안 배가 짐을 싣는다고 적혀 있다. 오른쪽 '제90기동부대' 상자에는 배 거의 200척(NHHC), 해군 수송함과 LST, 일본인이 모는 LST 27척, 민간인이 모는 MSTS 상선 수십 척, 대부분 두 번 오감이 적혀 있다. 아래로 부산(해병대, 제7보병사단)과 묵호(국군 2만 5,000명) 상자가 있고, 부산에서 흥남으로 돌아가는 점선은 다음 짐을 실으러 돌아가는 배를 뜻한다. 아래 상자에는 NHHC가 적은 계획 규모(11만~12만 명, 차량 1만 5,000대, 물자 40만 톤 이상)와, 배와 항구가 모자라 여러 번 오갔다는 설명이 있다. 지도가 아니며 실제 위치와 거리를 그리지 않았다는 메모가 있다
여러 길로 들어온 부대와 피란민이 항구 하나에 모여 배로 빠져나간 흐름입니다. 지도가 아니라 개념도입니다 (도표)(도표)

배를 모은 것은 미 해군 제90기동부대였습니다. 해군 수송함과 전차 상륙함(LST) 말고도 일본인 선원이 모는 LST 27척, 민간인 선원이 모는 군 해상 수송청(MSTS) 상선 수십 척이 함께했습니다. 배는 모두 200척에 가까웠습니다.

맨 먼저 탄 것은 장진호에서 내려온 제1해병사단이었습니다. 해병대는 12월 11일 흥남에 닿아 14일까지 배에 올랐고, 15일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한국 쪽 기록의 날짜도 이와 같습니다. 17일에는 국군 2만 5,000명과 차량 700대가 38선 남쪽 동해안의 묵호로 옮겨졌습니다.

짐은 할 수 있는 만큼 다 실었습니다. 고장 난 차량까지 리버티선 세 척에 실어 상대가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연료는 2만 9,500드럼을 싣고 200드럼만 남겼고, 탄약은 9,000톤을 실었습니다. 남긴 것은 옮기기 위험한 언 다이너마이트 1,000톤 정도였습니다.

해군 지휘부는 소련 잠수함과 만주 기지의 제트기를 걱정했지만, 잠수함은 잘못된 경보만 여러 번 있었고 공습도 오지 않았습니다.

부두에 모인 사람들

흥남에 모인 것은 군대만이 아니었습니다. 장진호 전투 때 하갈우리 근처 계곡과 동굴에 숨어 있던 주민들은 미군이 오자 그 둘레로 모였습니다. 피란민 수천 명이 해병대를 따라 내려왔습니다. 이들은 영하 27도의 추위 속에서 함흥과 흥남으로 왔습니다.

앞서 원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해군은 배에 실을 수 있는 만큼인 피란민 7,000명을 태웠지만, 2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철조망 앞에 남았습니다. 흥남은 더했습니다. 처음 계획에서 잡은 피란민 2만 5,000명은 크게 모자란 숫자였고, 함흥에서 흥남으로 가는 마지막 기차에만 5만 명이 몰렸습니다.

한국 쪽 기록에는 승선이 허락된 경위가 남아 있습니다. 알몬드는 처음에 실어야 할 무기와 장비가 많아 피란민을 태우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통역 현봉학의 설득으로, 마지막에는 남는 자리에 피란민을 태우도록 허락했습니다.

배는 사람으로 가득 찼습니다. LST 한 척에 적어도 5,000명, 한 번은 1만 명 넘게 탔습니다. 한국 쪽 백과는 LST 한 척에 정원의 10배가 넘는 5천여 명이 탔다고 적습니다. 용선한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는 피란민 1만 4,000명을 태우고 떠났습니다.

모든 배가 순조롭게 떠난 것은 아닙니다. 피란민 7,400명을 태운 한국 LST 한 척은 추진축이 걸려 해안을 떠나지 못했고, 배 안에서는 물과 음식이 모자랐습니다. 수리반과 잠수부의 도움을 받은 뒤에야 이 배는 12월 19일 바다로 나갔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마지막 배

밤에 움직인 중국군은 흥남 외곽까지 왔지만, H-056-1의 서술로는 방어선을 크게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NHHC 개요는 방어선의 부대가 중국군의 탐색 공격을 물리쳤다고 적습니다. 12월 18일 방어선은 반지름 약 5,000야드로 줄었습니다. 그날 알몬드와 참모들은 기함으로 옮겼고, 흥남 방어의 책임은 제90기동부대 사령관 도일 제독에게 넘어갔습니다.

제7보병사단은 19일까지 배에 올라 21일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철수의 마지막 날에는 미군 철수에 쓰고 남은 빅토리선 세 척과 LST 두 척에 피란민 5만 명이 가득 탔습니다.

1950년 흥남 철수 연표 도표. 위에서 아래로 10월 19일 중국군이 밤에 북한으로 건너오기 시작, 11월 30일 제10군단에 물러나 함흥에 모이라는 지시, 12월 1일 미 합참이 맥아더에게 제10군단 철수를 지시, 12월 7일 제10군단을 배로 서해안에 옮기는 안을 논의한 도쿄 회의, 12월 9일 철수 명령(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군의 성진 출항(NHHC), 12월 11일 제1해병사단 흥남 도착과 승선 시작, 12월 15일 해병대 부산으로 출항, 12월 17일 국군 2만 5,000명과 차량 700대를 묵호로, 12월 18일 방어선이 반지름 약 5,000야드로 줄어듦, 12월 21일 제7보병사단 부산으로 출항, 12월 24일 11시부터 마지막 부대 승선, 14시 10분 폭파 명령, 14시 36분 모든 부대가 항구를 벗어남. 아래 상자에는 백과가 해상 철수 기간을 12월 15~23일(해군 기준 24일)로 적는다는 것과, 줄 간격이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메모가 있다. 파랑은 흥남에서의 승선, 주황은 마지막 날이다
10월 중국군 도강부터 12월 24일 마지막 배까지의 흐름. 날짜는 NHHC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온 것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12월 24일 11시, 해안에 남은 마지막 부대가 배에 오르기 시작해 14시 5분에 모든 해안이 비었습니다. 14시 10분 도일 제독이 항구 시설 폭파를 명령했습니다. 수중 폭파대가 미리 설치한 폭약이 크레인과 부두, 안쪽 항구의 벽을 무너뜨렸고, 14시 36분 모든 부대가 항구를 벗어났습니다.

이날 탄약 더미 하나가 사고로 터져 상륙정 몇 척이 부서지고 사상자가 났습니다. 백과는 승선이 끝난 뒤 해군 함대와 폭격기의 집중 사격으로 남은 것을 폭파했다고 적습니다.

숫자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NHHC의 H-056-1은 흥남에서 미군과 한국군 10만 5,000명, 한국 피란민 9만 1,000명, 차량 1만 7,500대, 화물 35만 톤을 옮겼다고 적습니다. 대부분의 배는 두 번, 몇 척은 그보다 더 오갔습니다.

백과는 흥남에 모인 병력을 10만 5천여 명으로 적고, 배로 옮긴 것을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차량 1만 7,500대, 물자 35만 톤으로 적습니다. 피란민 수는 같은 항목 안에서도 9만여 명과, 30만 인파 가운데 9만 1천여 명으로 두 번 나옵니다. 백과에는 NHHC 쪽에 없는 항공 수송도 나옵니다. 병력 3,600명, 차량 196대, 물자 1,300톤입니다.

흥남 철수의 숫자를 자료별로 나눈 도표. 위쪽 표는 바다로 옮긴 총계로, 군인은 NHHC 10만 5,000명·백과 10만 명 넘음, 한국 피란민은 NHHC 9만 1,000명·백과 9만여 명(9만 1천여 명), 차량은 두 자료 모두 1만 7,500대, 화물은 두 자료 모두 35만 톤이다. 항공 수송은 백과에만 있고 병력 3,600명, 차량 196대, 물자 1,300톤이다. 아래쪽 막대는 NHHC가 적은 흥남의 피란민 숫자로, 계획 추정 2만 5,000명, 메러디스 빅토리호 한 척 1만 4,000명, 마지막 날 배 다섯 척 5만 명, 모두 배로 나온 사람 9만 1,000명, 남겨진 사람 적어도 9만 명(점선 막대)이다. 막대 길이는 10만 명이 600픽셀이다. 아래 상자에는 백과가 LST 한 척에 정원의 10배가 넘는 5천여 명이 탔고 30만 인파 가운데 9만 1천여 명이 배에 올랐다고 적었고, NHHC는 LST마다 적어도 5,000명이 탔다고 적었다는 메모가 있다
사람과 짐의 숫자. 자료마다 값과 세는 범위가 조금씩 달라 자료별로 나눠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날짜도 조금씩 다릅니다. 한국 쪽 기록에서 해상 철수 기간은 12월 15일 출항부터 23일까지이고, 해군 기준으로는 24일에 끝났습니다.

마지막에 탄 부대도 다르게 적힙니다. NHHC 개요는 제7보병사단 부대가 마지막에 탔다고 적지만, H-056-1은 제7보병사단의 승선이 19일에 끝났고 23일에는 제3보병사단의 마지막 부대가 싣고 있었다고 적습니다. 24일에 탄 마지막 부대의 이름은 적지 않았습니다.

어느 자료를 따르든 9만 명이 넘는 피란민이 배로 나왔습니다. 그래도 NHHC는 적어도 9만 명이 더 남겨졌다고 적고, 백과는 30만 인파 가운데 9만 1천여 명만 배에 올랐다고 적습니다.

남긴 것과 갈리는 해석

NHHC의 H-Gram 요약은 이 철수가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렸다고 적고, 군사적으로 쓸모 있는 것을 남기지 않았으며 적의 공격으로 잃은 것이 없었다고 씁니다. 그러면서 더 많은 피란민을 태울 자리가 없었던 것을 안타까운 일로 남겼습니다. 다만 앞서 본 탄약 사고로 사상자는 있었습니다.

백과는 흥남 철수가 대규모 육해공 합동 작전이었기에 가능했고, 그 덕에 국군과 유엔군이 상당한 전투력을 지켜 다음 작전을 할 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철수 결정은 여러 해 논쟁거리였습니다. H-056-1을 쓴 NHHC 소장은 함흥·흥남을 아마 지킬 수 있었을 것이고, 서울은 어차피 1월에 중국군에게 넘어갔다고 봅니다. 소장은 또 바다와 그 위 하늘을 쥐지 못했다면 이만한 철수는 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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