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년 10월 21일 아침 6시, 스페인 남서쪽 트라팔가르곶(Cape Trafalgar) 앞바다에서 두 함대가 서로를 보았습니다. 한쪽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였고, 다른 쪽은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이 이끄는 영국 함대였습니다. 그날 저녁 포성이 멎었을 때, 넬슨은 이미 자기 배 위에서 숨진 뒤였습니다.

이 해전은 영국 해군사에서 가장 이름난 싸움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넬슨의 함대는 수가 적었는데도 상대의 긴 대열을 두 곳에서 끊고 들어가 가까이 붙어 싸웠습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시대 군함은 어떻게 싸웠으며, 이 승리는 전쟁을 얼마나 바꿨을까요?

나폴레옹의 바다와 카디스의 함대

트라팔가르 해전은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중에 벌어졌습니다. 1805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의 프랑스 제국은 유럽 대륙을 쥐고 있었고, 바다는 영국 해군이 쥐고 있었습니다. 그리니치 왕립 박물관(Royal Museums Greenwich)은 나폴레옹이 1804년 영국 침공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막 전쟁을 선언한 오스트리아로 눈을 돌렸다고 설명합니다.

나폴레옹은 피에르 빌뇌브(Pierre Villeneuve) 중장의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에 스페인의 카디스(Cadiz) 항구를 떠나 지중해로 가라고 지시했습니다. 1805년 10월 19일 33척이 이탈리아의 나폴리를 치러 출항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을 이탈리아 쪽으로 끌어내 중부 유럽의 싸움을 흐트러뜨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이 함대를 없애고 싶어 했습니다. 영국의 안전과 바다의 우위를 위협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넬슨은 그해 여름 빌뇌브의 함대를 쫓아 서인도 제도까지 갔다가 돌아왔고, 이제 27척을 모아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넬슨의 계획: 두 줄로 곧장

1805년의 영국 함대는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수에서 연합 함대에 밀렸고, 해군 장관이던 세인트빈센트 백작(Earl of St Vincent) 때 여러 차례 비용 삭감도 겪었습니다. 그래서 넬슨의 계획은 배의 힘보다 장교와 수병의 솜씨와 경험에 기댔습니다.

넬슨은 9월 14일 기함 빅토리(Victory)를 타고 포츠머스를 떠나, 카디스 앞 40마일 바다에 함대를 두었습니다. 그는 함장들을 불러 만찬을 열고 자기 계획을 설명했습니다. 넬슨 자신은 이 계획을 'The Nelson Touch'라고 불렀습니다.

계획의 뼈대는 두 줄이었습니다. 넬슨이 한 줄을, 오랜 동료인 커스버트 콜링우드(Cuthbert Collingwood) 중장이 다른 한 줄을 이끌고 적에게 곧장 다가갑니다. 넬슨의 북쪽 줄은 적 기함을 향하고, 콜링우드의 줄은 적 대열의 뒤쪽을 칩니다. 영국의 포술이 훨씬 낫다는 계산된 위험에 기댄 방법이었고, 싸움을 가까운 거리의 결판으로 끌고 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생각은 10월 9일자 비망록(memorandum)으로 함장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영국 도서관(British Library)의 필사본 Add MS 37953은 서명 없는 넬슨의 자필 초고이고, 목록에는 "빅토리, 카디스 앞, 1805년 10월 9일"이라는 날짜와 함께 함장마다 서명한 사본이 전해졌다고 적혀 있습니다. 왕실 소장품을 관리하는 로열 컬렉션 트러스트(Royal Collection Trust)에는 콜링우드가 서명해 98문 전열함 프린스(Prince)의 함장에게 보낸 사본이 남아 있습니다.

그 사본은 항해할 때의 순서를 그대로 전투 순서로 쓰고(16척씩 두 줄), 적의 대열을 두세 토막으로 끊는 계획을 담고 있습니다. 넬슨은 그 안에 "바다에서 확실한 것은 없다(nothing is sure at sea)"고 적었습니다. 포탄은 적의 돛대만이 아니라 아군의 돛대와 활대도 날릴 것이라는 문장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계획보다 배가 적었습니다. 그리니치가 소장한, 1809년 책에 실린 판화의 설명에 따르면, 넬슨은 세 줄 공격에 40척을 바랐지만 27척으로 두 줄을 꾸려야 했습니다. 빌뇌브는 넬슨의 전술을 내다봤고 자신도 서로 돕는 두 줄 배치를 생각했지만, 결국 그것을 버리고 한 줄로 섰습니다. 그는 승리를 빌었지만, 사실은 패배를 예상했습니다.

10월 21일, 전열이 끊어지다

두 함대가 서로를 본 것은 오전 6시였고, 넬슨은 6시 40분에 전투 준비를 명령했습니다. 연합 함대는 트라팔가르곶 앞에서 한 줄로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함대는 서쪽에서 다가오며 차츰 두 줄을 이뤘습니다.

오전 11시 45분, 빅토리에 특별한 신호가 올랐습니다.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곧 "영국은 모든 사람이 자기 의무를 다하기를 기대한다"는 문장입니다. 5분 뒤인 11시 50분 빌뇌브가 '적과 교전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프랑스 배 푸괴(Fougueux)가 콜링우드의 기함 로열 소버린(Royal Sovereign)에 첫 포를 쐈습니다.

적의 대열에 먼저 닿은 것은 콜링우드였습니다. 그는 스페인 기함 가운데 하나인 산타 아나(Santa Anna)에 현측 포격을 퍼부었습니다. 그의 줄에 있던 배들은 비스듬한 줄로 뒤따르며 연합 함대의 뒤쪽을 에워쌌습니다.

넬슨은 큰 스페인 배 산티시마 트리니다드(Santissima Trinidad)를 향하다가, 빌뇌브의 기가 바로 뒤의 뷔상토르(Bucentaure)에 걸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빅토리의 함장 토머스 하디(Thomas Hardy)에게 그 배를 먼저 치라고 했습니다. 빅토리는 뷔상토르의 고물(배의 뒤끝) 아래를 지나며 현측 포격을 했고, 이 한 번이 뷔상토르에 결정타가 됐습니다.

빅토리는 이어 프랑스 배 르두타블(Redoutable)과 엉켜 함께 떠내려갔습니다. 그 자리에 크게 벌어진 틈으로 넬슨의 줄이 쏟아져 들어가 연합 함대를 둘로 갈랐습니다. 싸움은 배와 배가 붙어 서로 두들기는 포격전이 됐습니다.

트라팔가르 해전 연표 도표. 위 줄은 1805년 9월부터 1806년 1월까지: 9월 14일 넬슨이 빅토리를 타고 포츠머스 출발, 10월 9일 넬슨의 전투 비망록, 10월 19일 연합 함대 33척이 카디스 출항, 10월 21일 트라팔가르곶 앞 해전, 11월 6일 소식이 런던에 닿음, 1805년 12월 넬슨의 유해를 실은 빅토리가 시어니스에 닿음, 1806년 1월 9일 세인트폴 대성당 장례. 아래 줄은 10월 21일 하루: 오전 6시 두 함대가 서로를 봄, 6시 40분 전투 준비 명령, 11시 45분 'England expects' 신호, 11시 50분 빌뇌브의 교전 신호, 이어서 콜링우드가 먼저 적 대열에 닿음, 오후 1시 15분 넬슨이 총에 맞음, 4시 30분 넬슨이 숨짐, 5시 30분 포성이 멎음. 맨 아래 칸에 전투 뒤 폭풍으로 나포한 배 대부분을 버렸다는 것과 약 6주 뒤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적혀 있다. 점 사이 간격은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1805년 9월부터 장례까지, 그리고 10월 21일 하루.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와 시각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전열함, 현측 포격, 신호기: 그 바다의 무기

범선 시대 함대가 왜 한 줄로 섰는지는 배의 모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니치가 소장한 18세기 초 60문 전열함 모형을 보면, 24파운드 포 24문이 포갑판에, 9파운드 포 26문이 상갑판에, 6파운드 포 8문이 뒷갑판에 놓였고 앞갑판에는 6파운드 포 2문뿐이었습니다. 포 대부분이 배 옆구리에 줄지어 있으니, 배는 옆으로 쏩니다. 한쪽 옆의 포를 한꺼번에 쏘는 것을 현측 포격(broadside)이라고 합니다.

배들이 앞뒤로 한 줄을 이루면 모든 배가 같은 쪽 옆을 적에게 돌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대의 대열에 설 만큼 큰 군함을 전열함(ship of the line)이라고 불렀습니다. 넬슨의 빅토리는 포 100문, 포갑판 3층의 전열함이었습니다. 1765년 채텀에서 진수한, 그 이름을 단 다섯째 배였습니다.

영국 해군은 이런 대열을 지키는 방법을 문서로 정해 왔습니다. 그리니치의 '항해·전투 지침(Sailing and Fighting Instructions)' 소장품은 1673년 인쇄본부터 있고, 7년 전쟁 무렵까지 지침이 계속 바뀐 흔적을 보여 줍니다. 1756년부터는 추가·보충 지침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적의 대열을 뚫고 들어간다는 생각이 넬슨에게서 처음 나온 것도 아닙니다. 1796년 1월 31일 존 저비스(John Jervis) 경이 바로 그 빅토리에서 내린 비밀 지침은, 강한 배 무리가 적 함대를 뚫고 들어가 앞쪽 무리를 바람 위쪽에서 치게 했습니다. 넬슨의 계획은 함대 전체를 처음부터 두 줄로 나눠 적 대열의 한가운데와 뒤쪽을 노렸습니다.

그 방법에는 값이 따랐습니다. 포가 옆을 향한 배로 적 대열에 정면으로 다가가면, 다가가는 동안 앞쪽 배들은 되쏠 수 있는 포가 적습니다. 그리니치의 터너 그림 해설도 영국 배들이 처음에는 프랑스·스페인의 포에 드러났지만, 대열을 꿰뚫은 뒤에는 엄청난 포화를 쏟아부었다고 적습니다.

두 칸으로 된 개념 도표. 왼쪽 칸은 범선 군함 한 척을 크게 그려 포가 양옆에 줄지어 있어 옆으로 쏜다는 것과, 여러 배가 한 줄로 앞뒤를 이어 항해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오른쪽 칸은 1805년 10월 21일의 배치를 줄인 것이다. 오른쪽에 남북으로 한 줄로 선 연합 함대가 있고, 가운데에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와 빌뇌브의 뷔상토르, 뒤쪽(남쪽)에 산타 아나가 표시돼 있다. 서쪽에서 영국 함대가 두 줄로 다가간다. 북쪽 줄은 빅토리의 넬슨이 가운데로, 남쪽 줄은 로열 소버린의 콜링우드가 뒤쪽으로 향하며 먼저 닿는다. 다가가는 동안 적의 포에 드러난다는 메모가 있다. 지도가 아니고 축척이 없으며 배 수와 위치를 줄였다는 메모가 있다
한 줄로 선 함대와, 그 줄을 두 곳에서 끊으려 한 넬슨의 두 줄. 지도가 아니라 생각의 틀을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대열을 꿰뚫은 뒤에는 포술 훈련이 차이를 냈습니다. 그리니치 연표는 영국이 넬슨의 사전 계획과, 빠르고 정확하게 쏘도록 더 잘 훈련된 수병 덕분에 유리했다고 설명합니다.

신호기도 이 시대 함대의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넬슨의 "England expects"도 빅토리에 올린 신호로 함대에 전해졌습니다. 1824년 화가 J. M. W. 터너(Turner)가 그린 트라팔가르 그림에는 빅토리의 주돛대에 'duty'를 나타내는 신호기가 걸려 있습니다. 그날의 신호와, 넬슨이 남긴 마지막 말 가운데 하나("Thank god I have done my duty")를 함께 가리키는 장치입니다.

넬슨의 죽음과 폭풍

넬슨은 오후 1시 15분 빅토리 위에서 총에 맞았습니다. 그리니치의 빅토리 모형 설명은 그가 상갑판에 서 있다가 총탄에 치명상을 입었다고 적습니다. 그는 오후 4시 30분에 숨졌고, 포성은 오후 5시 30분에야 멎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 사나운 폭풍이 불었습니다. 영국 함대는 나포한 배 대부분을 버려야 했습니다. 싸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바다는 다시 위험한 곳이 됐습니다.

구조에 나선 배도 있었습니다. 로열 컬렉션 트러스트의 설명으로는, 몸이 둔해 싸움에 늦게 닿은 프린스가 그 덕에 다치지 않았고, 전투 끝 무렵 폭발한 프랑스 배 아실(Achille)의 수병들을 구했습니다. 프린스는 다른 멀쩡한 배들과 함께 가라앉는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에서 350명을 더 구했습니다.

그날의 고통은 그림에도 남았습니다. 터너의 그림 앞쪽에는 부서진 배의 잔해에 매달린 채 물에 빠진 수병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승리를 기리는 그림이면서, 그 바다에서 죽어 간 보통 사람들을 함께 보여 줍니다.

숫자 읽기: 배와 사람과 사상자

트라팔가르의 숫자는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같은 그리니치 왕립 박물관 안에서도 쪽마다 다른 값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숫자마다 어느 자료의 것인지 함께 적습니다.

배의 수는 영국 전열함 27척 대 연합 함대 33척입니다. 사람과 포는 그리니치 연표에 따르면 영국이 18,000명과 2,148문, 연합 함대가 약 3만 명과 2,632문이었습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는 영국 해군 쪽에서 싸운 사람을 18,000명 넘게로 셉니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숫자를 자료별로 견준 막대 도표. 전열함: 영국 27척, 연합 함대 33척(그리니치 터너 그림 글). 사람: 영국 18,000명(그리니치 연표), 18,000명 넘음(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연합 함대 약 3만 명(그리니치 연표). 포: 영국 2,148문, 연합 함대 2,632문. 전사자: 영국 449명(그리니치 연표)과 456명(그리니치 터너 그림 글), 연합 함대 4,408명(그리니치 연표)과 4,000명 넘음(그리니치 터너 그림 글). 아래 띠는 연합 함대 33척의 운명: 17척 나포, 1척 불타는 잔해, 4척 빠져나갔다가 몇 주 뒤 나포, 11척 카디스 귀항. 맨 아래에 나포한 배 대부분을 폭풍 속에 버렸고 영국은 배를 잃지 않았다는 것, 국립문서보관소는 넬슨 함대를 33척으로, 그리니치는 영국 전열함을 27척으로 센다는 메모가 있다
배, 사람, 포, 전사자의 수. 같은 박물관 안에서도 쪽마다 숫자가 조금씩 다릅니다 (도표)(도표)

전사자는 더 갈립니다. 그리니치 연표는 영국 수병 449명이 죽고 1,217명이 다쳤으며, 프랑스·스페인 쪽은 4,408명이 죽고 2,545명이 다쳤고 약 2만 명이 포로가 됐다고 적습니다. 그리니치의 터너 그림 해설은 영국 전사자를 456명, 프랑스·스페인 전사자를 4,000명 넘게로 적습니다.

배의 운명도 숫자로 남았습니다. 포성이 멎었을 때 연합 함대 배 17척이 나포됐고 1척은 불타는 잔해였습니다. 4척은 빠져나갔다가 몇 주 뒤 붙잡혔고, 11척이 카디스로 돌아갔습니다. 영국은 한 척도 잃지 않았습니다.

'33'이라는 숫자는 두 번 나오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니치는 10월 19일 카디스를 떠난 연합 함대를 33척으로 적고, 국립문서보관소는 넬슨의 함대를 이룬 배를 33척으로 셉니다. 영국 전열함 27척과 넬슨 함대 33척은 서로 다른 것을 센 값입니다.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1805년 영국 해군은 약 11만 명을 고용했고, 그해 해군에 있던 사람이라면 대략 여섯에 하나꼴로 트라팔가르에 있었습니다. 넬슨 함대의 사람들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인도, 유럽 여러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는 제인 타운센드(Jane Townshend)를 트라팔가르에서 복무한 것이 확실히 밝혀진 유일한 여성으로 기록합니다.

남긴 것: 바다의 우위, 그러나 전쟁은 이어졌다

승전 소식은 2주쯤 뒤인 1805년 11월 6일 새벽 런던에 닿았습니다. 같은 날 런던 가제트(The London Gazette) 특별호 15858호가 콜링우드의 보고를 실었습니다. 콜링우드는 넬슨이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의 시간에 쓰러졌다(fell in the Hour of Victory)"고 적었습니다.

기쁨은 슬픔에 가려졌습니다. 콜링우드는 남작이 됐고, 함장들은 해군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정부는 참전한 모든 사람에게 특별 지급금을 주었는데, 나포한 배가 폭풍에 가라앉아 받지 못하게 된 상금을 메우려는 것이었습니다.

넬슨의 유해는 1805년 12월 빅토리에 실려 시어니스에 들어왔습니다. 1806년 1월 9일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장례가 열렸습니다. 예배는 네 시간쯤 이어졌고, 끝에 빅토리의 기를 덮은 관이 지하 묘소로 내려졌습니다. 그의 시신은 원래 울지 추기경을 위해 만든 16세기 대리석 석관에 놓였습니다.

이 해전이 남긴 것은 두 면으로 읽어야 합니다. 국립문서보관소는 트라팔가르가 당시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계획을 꺾었고, 20세기까지 이어진 영국의 바다 지배의 바탕이 됐다고 평가합니다. 그리니치도 이 승리가 '바다의 지배자'라는 영국의 평판을 굳혔다고 적고, 1809년에는 732척에 14만 명 넘게 복무해 그때까지 가장 많았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나 그리니치 연표는 트라팔가르가 전쟁 전체의 흐름에는 영향이 적었다고도 적습니다. 6주 뒤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Austerlitz)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크게 이기고 유럽에서 자기 자리를 굳혔습니다. 바다는 영국이 쥐었지만, 육지의 전쟁은 그 뒤로도 1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기억의 모습도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터너가 1824년 조지 4세를 위해 그린 큰 그림은 걸리자마자 비판을 받았습니다. 빅토리의 함장이었던 하디는 그 그림을 '거리 풍경'에 빗댔습니다. 터너가 담고 싶었던 것은 전투의 사실보다 사람의 드라마였습니다.

빅토리는 1812년 현역에서 물러났습니다. 1922년에는 2번 건선거에 들어가 트라팔가르 때의 모습으로 복원됐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나폴레옹 전쟁 한눈에: 군단 체제와 징병: 트라팔가르를 둘러싼 육지의 전쟁을 넓게 봅니다.
  • 아우스터리츠 전투: 세 황제의 전투: 트라팔가르 6주 뒤 육지에서 벌어진 결전입니다.
  • 스페인 무적함대(1588): 바다와 날씨가 가른 원정: 200여 년 앞선 범선과 대포의 해전을 기록으로 따라갑니다.
  • 구축함과 호위함: 범선 시대 뒤 군함의 이름과 역할이 어떻게 나뉘었는지 봅니다.
  • 전술 데이터링크: 깃발로 뜻을 전하던 함대가 오늘은 장비끼리 정보를 어떻게 나누는지 이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