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에서 북동쪽으로 가면 바다에 닿은 평원이 나옵니다. 이름이 마라톤입니다. 기원전 490년, 에게해를 건너온 페르시아 원정군이 이곳에 내렸고 아테네 군대가 마주 섰습니다.

그리스 땅에서 두 세력이 처음 크게 부딪친 싸움이었습니다. 줄거리는 대부분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의 『역사』에서 옵니다. 그 기록을 뼈대로 삼고, 그리스 정부의 고고학 전시와 예일 대학 강의가 보태거나 다르게 읽는 대목을 옆에 놓아 보겠습니다.

왜 페르시아는 아테네로 왔나

시작은 바다 건너 소아시아였습니다. 기원전 499년, 그곳의 이오니아(Ionia) 사람들이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Darius I)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Eretria)가 반란군을 도왔고, 이 도움이 페르시아가 공격할 빌미가 됐습니다.

아테네는 배 20척을 보내기로 표결했습니다. 반란 중에 페르시아의 거점 사르디스(Sardis)가 불탔고, 그 지방 여신 키벨레의 신전도 무너졌습니다. 헤로도토스는 그 20척을 두고 그리스와 이방인 모두에게 재앙의 시작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왕은 이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저녁상이 차려질 때마다 하인이 "주인님, 아테네 사람들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세 번 되풀이했습니다. 흙과 물, 곧 복종의 표시를 바치지 않은 이들을 굴복시킬 구실이 생긴 것도 다리우스에게는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다리우스는 다티스(Datis)와 자기 조카 아르타페르네스(Artaphernes)에게 원정을 맡기며, 아테네와 에레트리아 사람들을 사로잡아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일 대학의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 교수는 원정의 목적을 셋으로 정리합니다. 대왕을 모욕하고 해친 두 도시를 벌하는 것, 아테네의 옛 참주 히피아스(Hippias)를 다시 그 자리에 앉히는 것, 그리고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러 가는 길에 발판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바다를 건너 마라톤까지

첫 시도는 2년 앞서 실패했습니다. 기원전 492년 페르시아 함대가 아토스산이 있는 반도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거의 부서졌고, 그때의 침공은 그만둬야 했습니다.

490년의 원정은 길을 바꿨습니다. 함대는 모두 3단 노선(trireme) 600척이었고, 해안을 따라가는 대신 섬과 섬 사이로 에게해를 곧장 건넜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전해의 아토스 피해를 두려워한 것을 주된 까닭으로 들었습니다.

가는 길에 섬들의 처지가 갈렸습니다. 낙소스(Naxos)에서는 신전과 도시가 불타고 사람들이 끌려갔습니다. 다티스는 델로스(Delos)를 "두 신이 태어난 땅"이라며 해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인질을 거부한 카리스토스(Carystus)는 포위당하고 주변 땅이 망가진 뒤에야 따랐습니다.

다음은 에레트리아였습니다. 아테네가 도우라고 보낸 4천 명은 에레트리아 사람의 권고를 듣고 오로포스로 건너가 화를 피했습니다. 성은 엿새를 버텼지만 이레째 되는 날 시민 두 사람이 성을 넘겼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사르디스 신전이 불탄 것을 갚는다며 신전을 불태우고 주민을 모두 끌고 갔습니다.

가로 연표 도표.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 반란 시작(반란 중 아테네의 지원과 사르디스 화재), 492년 아토스산 앞바다의 폭풍으로 침공 중단, 490년 에게해를 건넌 원정과 마라톤 전투, 480~479년 두 번째 침공. 아래 상자에 490년의 길이 낙소스(도시 불탐), 델로스(해치지 않음), 카리스토스(포위), 에레트리아(이레째 함락), 마라톤(전투 뒤 팔레론) 순서로 화살표로 이어져 있다
이오니아 반란에서 마라톤까지. 이 글의 출처에 나온 일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그다음 목적지가 마라톤이었습니다. 아티카(Attica) 땅에서 기병이 움직이기에 마라톤만 한 곳이 없었고, 에레트리아와도 아주 가까웠습니다. 길을 안내한 사람은 히피아스였습니다.

싸울 것인가 기다릴 것인가

아테네도 군대를 마라톤으로 보내 지키며 기다렸습니다. 지휘는 장군 열 명이 나눠 맡았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밀티아데스(Miltiades)였습니다. 이웃 도시 플라타이아(Plataea)는 전군을 보내 합류했습니다.

도시를 떠나기 전, 장군들은 훈련된 달리기꾼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를 스파르타로 보냈습니다. 그는 아테네를 떠난 다음 날 스파르타에 닿았습니다.

스파르타는 돕고 싶어 했지만 정해진 법을 깨려 하지 않았습니다. 보름이 되기 전에는 군대를 내보낼 수 없다며 보름달을 기다렸습니다. 케이건은 이 사정이 핑계였다기보다 진심이었다고 보는 쪽이고, 사자의 실제 이름은 사본이 잘못 옮긴 것으로 필리피데스(Philippides)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마라톤 진영에서는 장군들의 의견이 반으로 갈렸습니다. 페르시아 대군과 싸우기에는 수가 너무 적다는 쪽과 당장 싸우자는 쪽이었고, 밀티아데스는 뒤쪽이었습니다. 이때 폴레마르코스(polemarch)라는 직책도 장군 열 명과 함께 표를 던질 수 있었습니다. 밀티아데스가 폴레마르코스 칼리마코스(Callimachus)를 설득했고, 그 한 표로 싸우기로 정해졌습니다.

이 논쟁이 어디서 있었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헤로도토스는 마라톤에 간 뒤에 다퉜다고 쓰지만, 케이건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군대를 보낼지, 얼마나, 누구 지휘로 보낼지는 아테네 민회가 정해야 했으니 논쟁도 거기서 있었고, 그 뒤 두 군대가 한 주쯤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들판의 하루: 두꺼운 날개, 얇은 가운데

밀티아데스는 다른 장군들이 지휘 차례를 넘겨줬는데도 자기 차례가 돌아온 날까지 기다렸다가 싸웠습니다. 오른쪽 날개는 당시 규칙대로 폴레마르코스 칼리마코스가 맡았습니다. 가운데에는 아테네의 부족들이 번호 순서대로 섰고, 맨 왼쪽 끝은 플라타이아군이었습니다.

배치에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아테네 전열을 페르시아 전열과 같은 길이로 맞추느라 가운데의 줄 수를 줄였고, 가운데는 가장 약한 곳이 됐습니다. 대신 두 날개는 여러 줄로 두껍게 세웠습니다.

신호가 떨어지자 아테네군은 달려서 공격했습니다. 두 군대 사이는 영어 번역본으로 8펄롱(furlong)에 조금 못 미쳤습니다. 페르시아군은 기병도 궁수도 없는 적은 무리가 뛰어오는 것을 보고 아테네군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자기가 아는 한 달려서 돌격한 그리스인은 이들이 처음이었고, 그때까지 그리스인은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쪽을 부르는 이름인 메디아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워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싸움은 가운데와 양쪽에서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페르시아인과 사카이(Sacae)인이 선 가운데에서는 페르시아 쪽이 이겨 그리스군을 뚫고 안쪽까지 쫓았습니다. 두 날개에서는 아테네군과 플라타이아군이 이겼습니다. 날개의 병사들은 달아나는 적을 내버려 두고 하나로 합쳐, 가운데를 뚫은 적을 돌아서 쳤습니다.

세 칸짜리 개념 도표. 첫째 칸: 페르시아 전열 앞에 그리스 전열이 같은 길이로 서 있고, 왼쪽 날개(플라타이아)와 오른쪽 날개(칼리마코스)는 두껍고 가운데는 얇으며, 화살표가 달려서 공격함을 보인다. 둘째 칸: 페르시아인·사카이인이 선 가운데가 그리스 가운데를 밀어내고, 두 날개는 맞은편 적을 몰아낸다. 셋째 칸: 두 날개가 안쪽으로 돌아 페르시아 가운데를 치고, 페르시아군은 바닷가와 배 쪽으로 달아나며 아테네군이 배 7척을 빼앗는다. 지도가 아니고 축척이 없다는 메모가 있다
두꺼운 날개, 얇은 가운데. 헤로도토스의 서술을 네모와 화살표로만 줄인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그리스 문화체육부 전시도 같은 줄거리를 소개하며 한 장면을 보탭니다. 바다 쪽이나 평원 쪽으로 흩어져 달아나던 페르시아군 가운데 일부가 큰 늪(Great Marsh)에 빠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큰 늪 쪽을 싸움터로 고른 것도 페르시아군의 이점을 없애려는 뜻이었다는 설명입니다.

추격은 바닷가까지 이어졌습니다. 아테네군은 배를 붙잡고 불을 가져오라고 외쳤고, 이 싸움에서 칼리마코스와 장군 스테실라오스(Stesilaus)가 전사했습니다. 아테네군은 배 7척을 빼앗았습니다.

남은 배들은 섬에 두었던 에레트리아 포로를 다시 태우고 수니온(Sunium)곶을 돌았습니다. 아테네군보다 먼저 아테네에 닿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문화부 전시에 따르면 아테네군은 아리스테이데스(Aristeides)와 그 부하들에게 죽은 이들을 묻게 하고 쉬지 않고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아테네군이 먼저 닿았고, 당시 아테네의 항구였던 팔레론(Phaleron) 앞바다에 온 페르시아 함대는 잠시 머문 뒤 아시아로 돌아갔습니다.

이 무렵 알크마이온 가문(Alcmaeonidae)이 페르시아와 내통해 배에 오른 페르시아군에게 방패를 들어 신호했다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이 소문을 전하면서도, 자신은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적었습니다.

방패와 창: 호플리테스와 팔랑크스

아테네군의 중심은 호플리테스(hoplite)라는 중무장 보병이었습니다. 머리와 목을 덮고 눈·코·입만 열어 둔 코린토스식 투구를 쓰고, 금속 흉갑을 입었습니다. 둥근 방패는 나무 속에 청동을 입힌 것으로, 가죽 손잡이 두 곳으로 팔에 단단히 묶었습니다.

방패를 왼손에 들었으니 창은 다른 손, 곧 오른손의 몫이었습니다. 창은 나무 자루에 청동 날을 단 것으로, 길이가 약 1.80 m였습니다. 창은 던지지 않고 찌르는 무기였고, 칼은 창을 잃었을 때나 몸이 맞붙은 싸움에서 썼습니다.

눈여겨볼 곳은 방패의 자리입니다. 왼팔에 든 방패는 자기 몸을 가리면서 왼쪽으로 삐져나가, 왼쪽에 선 동료의 드러난 오른쪽까지 덮었습니다. 이렇게 방패가 맞물린 빽빽한 줄을 팔랑크스(phalanx), 곧 밀집 대형이라고 부릅니다. 케이건은 이것을 전통적 해석으로 소개하며, 방패가 맞물려 병사들이 단단한 한 덩어리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위에서 본 한 줄의 개념 도표. 병사 네 명이 나란히 서 있고, 각자 왼팔의 둥근 방패가 왼쪽으로 겹쳐 나가 왼쪽 옆 병사의 드러난 오른쪽을 덮는다. 오른손에는 앞을 향한 창이 있고 '찌르는 창, 던지지 않음'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아래에 방패는 나무 속에 청동, 창은 나무 자루와 청동 날로 약 1.80 m라는 설명이 있다
방패가 맞물린 줄. 왼팔의 방패가 왼쪽 옆 사람의 오른쪽까지 가립니다 (도표)(도표)

비 오는 날 줄지어 선 사람들이 우산을 조금씩 왼쪽으로 기울여 옆 사람 어깨까지 가려 주는 모습과 닮았습니다. 실제로는 다릅니다. 막아야 할 것은 빗물이 아니라 적의 창이었고, 방패는 나무에 청동을 입힌 판이었습니다.

맞은편 페르시아군의 무장은 달랐습니다. 정예 부대인 불사 부대(Immortals)를 빼면 페르시아군은 가볍고 모자란 무장을 갖췄습니다. 케이건의 설명으로는 페르시아 보병이 무거운 갑옷 없이 고리버들 방패를 들었고, 여러 복속 민족이 모인 군대였습니다. 배에는 기병도 실려 있었지만 이 전투에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습니다.

숫자와 날짜는 자료마다 다르다

마라톤 전투의 숫자는 어느 자료를 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세 자료를 나란히 놓으면 이렇습니다.

항목헤로도토스그리스 문화체육부 전시케이건 강의
페르시아군병력 수 없음, 함대는 3단 노선 600척20,000~25,000명, 배 600척보병 2만~3만 명(많은 이가 받아들이는 추정)
그리스군병력 수 없음아테네 9,000명, 플라타이아 1,000명1만 명쯤
전사자페르시아 약 6,400명, 아테네 192명아테네 192명, 플라타이아 11명, 페르시아 6,400명그리스인 192명
상륙 시점없음기원전 490년 9월 초 상륙기원전 490년 8월 4일 상륙

헤로도토스의 마라톤 대목에는 양쪽 병력 수가 나오지 않습니다. 문화부 전시는 "자료에 따르면"이라는 말을 붙여 숫자를 들었고, 케이건은 몇 명인지 모른다고 먼저 밝힌 뒤 추정치를 소개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이 내린 때도 8월과 9월 초로 갈립니다.

읽을 때 하나 더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케이건은 헤로도토스가 책 전체에서 아테네에 우호적이고,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 가운데 다수가 자기 식으로 이야기한 아테네 사람들이었다고 지적합니다. 한쪽의 목소리가 큰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스파르타군은 끝내 싸움에 맞추지 못했습니다. 보름이 지난 뒤 2천 명이 사흘 만에 아티카에 닿았지만 전투는 끝난 뒤였습니다. 그들은 마라톤까지 가서 쓰러진 페르시아군을 보고, 아테네를 칭찬한 뒤 돌아갔습니다.

무덤과 이야기로 남은 것

들판에는 무덤이 남았습니다. 발굴에서 전사한 아테네인의 무덤인 소로스(Soros)와, 뼈와 깨진 그릇 조각이 섞인 화장 층이 드러났습니다. 브라나스(Vranas) 지역의 다른 무덤은 플라타이아인과 전투에 참여한 노예들의 무덤으로 확인됐습니다. 케이건은 싸운 들판에 그대로 묻히는 것이 전사한 그리스인 192명에게 특별한 영예였다고 설명합니다.

이름도 남았습니다. 에렉테이스(Erechtheis) 부족 전사자의 이름을 새긴 비석은 처음에 무덤 위에 서 있었습니다. 뒤에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 Atticus)가 키누리아의 별장으로 옮겼고, 2000년에 그 지역의 초기 기독교 건물 안에서 발견됐습니다. 전시는 이런 발굴이 헤로도토스와 다른 문헌의 기록을 뒷받침하고 채운다고 봅니다.

이 싸움은 무엇을 남겼을까요? 그리스 문화체육부 전시는 기원전 508년에 갓 세워진 아테네 민주정이 자유 시민 호플리테스로 강한 적을 막아 내며 굳어졌다고 봅니다. 케이건은 마라톤이 이후 그리스 역사 내내 호플리테스의 큰 승리로 여겨졌고,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이긴 첫 싸움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케이건은 자기 같은 사람들이 이 전투의 의미를 부풀린다는 지적이 있다고 짚은 뒤, 그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테네가 마라톤에서 졌다면 민주정도 서양 문명도 없었을 것이라며 강의를 맺습니다. 기록이 아니라 한 학자의 해석입니다.

이야기는 마라톤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0년 뒤인 기원전 480~479년, 페르시아는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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