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남동쪽 이스트서식스에 배틀(Battle)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전투'라는 뜻입니다. 1066년 10월 14일, 이 도시가 생기기 전의 낮은 능선에서 잉글랜드 왕 해럴드(Harold)의 군대와 노르망디 공 윌리엄(William, Duke of Normandy)의 군대가 하루 종일 맞섰습니다. 저녁 무렵 해럴드가 쓰러졌고, 그해 성탄절에는 윌리엄이 웨스트민스터에서 왕관을 썼습니다.

이 싸움이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입니다. 한 해에 세 사람이 같은 왕관을 노린 까닭, 능선 위의 하루가 흘러간 모습, 그 뒤 잉글랜드에 남은 것을 차례로 따라갑니다. 당대 연대기와 바이외 태피스트리를 지키는 박물관, 전장을 관리하는 잉글리시 헤리티지(English Heritage)의 설명을 나란히 놓으면, 숫자와 이야기가 어디서 갈리는지도 함께 드러납니다.

왕은 한 명인데 후보는 셋

1066년 1월 5일,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가 직계 후계자 없이 죽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웨식스 백작 해럴드가 왕이 됐습니다. 에드워드의 처남이자 왕의 군대를 이끌던 사람이었습니다.

해럴드 쪽 근거는 에드워드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에드워드가 죽은 뒤 곧 쓰인 그의 전기는 왕이 해럴드에게 "이 여인과 온 왕국을 그대의 보호에 맡긴다"고 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앵글로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는 판본에 따라 왕국을 '주었다'고도, '맡겼다'고도 적습니다. 같은 장면인데 말의 무게가 기록마다 다릅니다.

바다 건너에도 왕관을 노리는 사람이 둘 있었습니다. 노르웨이 왕 하랄 하르드라다(Harald Hardrada), 그리고 에드워드의 육촌인 노르망디 공 윌리엄입니다. 노르만 쪽 자료에서 윌리엄은 1051년에 에드워드에게 왕위를 약속받았고, 1064년이나 1065년 노르망디에 온 해럴드에게서 맹세도 받았습니다. 1066년 이전의 잉글랜드 기록에는 이 맹세 이야기가 없습니다.

혈통만 따지면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에드워드의 종손 에드거 애설링(Edgar Ætheling)입니다. 혈통으로는 그의 주장이 가장 강했지만, 1066년에 그는 아마 14살 안팎이었습니다. 40살 안팎에 전쟁 경험이 많은 해럴드와는 처지가 크게 달랐습니다.

북쪽과 남쪽, 두 번의 침공

봄이 되자 잉글랜드 하늘에 낯선 별이 떴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혜성이라 불렀습니다. 곧이어 해럴드의 동생 토스티그(Tostig)가 배를 끌고 와 해안을 약탈하며 샌드위치까지 올라왔습니다.

해럴드는 이 땅의 어떤 왕도 모은 적 없을 만큼 큰 육군과 해군을 불러 모았습니다.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건너오리라는 소식이 믿을 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와이트섬(Isle of Wight)에 머물며 여름과 가을을 기다렸습니다. 9월 초, 식량이 바닥난 군대와 함대는 결국 해산했습니다.

침공은 반대쪽 끝에서 왔습니다. 연대기에 따르면 하르드라다는 배 300척을 이끌고 왔고 토스티그가 그 편에 섰습니다. 9월 20일, 북쪽의 에드윈 백작과 모르카르 백작이 요크 남쪽 풀퍼드(Fulford)에서 졌습니다. 닷새 뒤인 9월 25일, 북쪽으로 달려온 해럴드가 요크 동쪽 5마일의 스탬퍼드 브리지(Stamford Bridge)에서 이겼고 하르드라다와 토스티그가 함께 죽었습니다.

남쪽 해안에 노르만이 내렸다는 소식이 해럴드에게 닿을 수 있었던 가장 이른 때는 10월 2일 무렵입니다. 그는 두 주 안에 헤이스팅스 앞에 섰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오랫동안 이것을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온 '긴 행군'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이 행군이 당대 자료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짚습니다.

길을 따져 보면 얼마나 빠듯했는지 보입니다. 런던에 며칠만 머물렀더라도 요크셔에서 런던까지 200마일을 이레에 가고, 다시 50마일을 더 가야 했습니다. 한 기록은 해럴드가 런던에 엿새까지 머물렀다고도 합니다. 역사학자 톰 라이선스(Tom Licence)는 해럴드가 함대로 사람을 북쪽에서 실어 날랐을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어떻게 이동했는지는 지금도 확실히 말할 수 없습니다.

두 줄짜리 1066년 연표 도표. 위 줄은 1월 5일 에드워드 사망, 1월 6일 해럴드 대관, 여름 동안 남쪽에서 기다린 해럴드의 군대와 함대, 9월 초 해산, 9월 12일 폭풍으로 생발레리로 밀려난 노르만 함대. 아래 줄은 9월 20일 풀퍼드, 9월 25일 스탬퍼드 브리지, 9월 28일 밤 노르만의 해협 건너기와 페븐지 상륙, 10월 2일 무렵 해럴드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가장 이른 때, 10월 13일 저녁 잉글랜드군 도착, 10월 14일 헤이스팅스 전투, 12월 25일 윌리엄 대관. 점의 색으로 잉글랜드 쪽, 노르만 쪽, 북쪽 노르웨이 침공을 나눈다
1066년, 빈 왕좌에서 대관까지.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바다를 건넌 군대와 말

윌리엄은 봄부터 늦여름까지 배를 지었습니다. 노르망디 사람만 모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브르타뉴와 프랑크, 플랑드르의 봉신과 동맹이 함께했고, 윌리엄은 교황의 축복까지 얻었습니다.

함대가 모인 곳은 디브(Dives) 강 어귀였습니다. 8월 초에 다 모였지만 한 달 동안 바람이 맞지 않았습니다. 돛이 하나뿐인 배는 남풍이 불어야 잉글랜드로 건널 수 있었습니다. 9월 12일에는 폭풍이 함대를 동쪽 솜(Somme) 강 어귀의 생발레리(Saint-Valery)로 밀어냈고, 거기서 다시 두 주를 기다렸습니다.

가장 까다로운 짐은 말이었습니다.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함대가 말 2,000마리 넘게 실었다고 봅니다. 트인 배에 말을 싣고 바다를 건너는 일은 당시 북유럽에서 새로웠습니다. 기사들은 그 방법을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 밑에서 싸운 노르만 사람들에게서 배웠을 것입니다.

함대는 9월 28일 밤 막힘없이 해협을 건넜고, 새벽에 페븐지(Pevensey) 해변에 닿았습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윌리엄이 성 미카엘 축일 전날 페븐지에 왔고, 내린 뒤 곧 헤이스팅스 항구에 성을 지었다고 적습니다. 노르만의 자리를 지키려고 세운 나무 요새였습니다. 해럴드가 북쪽에 묶여 있는 동안 윌리엄은 싸움을 준비할 틈을 얻었습니다.

능선 위의 하루

잉글랜드군은 10월 13일 저녁, 헤이스팅스에서 7~8마일 떨어진 지금의 배틀 자리에 도착했습니다. 잉글랜드 쪽 기록들은 해럴드가 힘을 다 모으기도 전에 런던을 떠났고, 윌리엄이 군대가 다 모이기 전의 해럴드에게 불시에 맞섰다고 전합니다.

14일 날이 밝자 해럴드는 능선을 따라 군대를 세웠습니다. 지금 배틀 수도원이 일부 자리 잡은 그 능선입니다. 맞은편 남쪽 오르막에는 윌리엄이 군대를 셋으로 나눠 늘어세웠습니다. 왼쪽에 브르타뉴 사람, 가운데에 노르만, 오른쪽에 프랑크와 플랑드르 사람이었습니다.

노르만 쪽 기록자 푸아티에의 기욤(William of Poitiers)은 그 순서를 남겼습니다. 활과 석궁을 든 보병이 맨 앞, 사슬 갑옷을 입은 보병이 둘째, 기병 무리가 맨 뒤였습니다. 윌리엄은 정예와 함께 그 가운데에 서서 목소리와 몸짓으로 지휘했습니다.

전투 개념 도표. 위쪽 능선(뒤에 배틀 수도원이 선 자리)에 둥근 방패가 줄지어 겹친 잉글랜드 방패벽이 있고 가운데에 해럴드의 깃발이 있다. 아래쪽 남쪽 오르막에 노르만군 세 무리(왼쪽 브르타뉴, 가운데 노르만과 윌리엄, 오른쪽 프랑크와 플랑드르)가 있고, 무리마다 앞에서부터 궁수와 석궁수, 사슬 갑옷 보병, 기병이 서 있으며 화살표가 능선을 향한다. 오른쪽 상자에 하루의 흐름 네 단계가 적혀 있다. 지도가 아니고 축척이 없으며, 2013년 지형 분석은 윌리엄이 남동쪽에서 왔을 수 있다고 본다는 메모가 있다
능선 위 방패벽과 남쪽의 세 무리. 기록을 네모와 화살표로만 줄인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싸움은 하루 종일 이어졌습니다. 중세 기준으로는 아주 긴 전투였고,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이것을 두 군대의 힘이 비슷했다는 표시로 읽습니다. 방패를 맞댄 잉글랜드군은 비탈을 오르며 거듭 덮치는 노르만 기병과 궁수를 버텼습니다.

한때는 잉글랜드 쪽으로 기우는 듯했습니다. 노르만군은 언덕 위의 적을 몰아내지 못한 채 큰 손실을 입었고, 윌리엄이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일부 노르만군이 바다 쪽으로 물러나자 잉글랜드군이 비탈 위 자리를 떠나 뒤를 쫓았습니다. 윌리엄은 투구를 벗어 얼굴을 보였고, 노르만 기병이 다시 앞으로 나왔습니다.

전투 뒤 60년 가까이 지나 1125년 무렵 글을 쓴 맘즈베리의 윌리엄(William of Malmesbury)은 다른 장면을 전합니다. 공작이 달아나는 척 물러나라고 신호했고, 굳게 뭉쳐 있던 잉글랜드 대열이 쫓으려고 열리자 노르만이 돌아서 쳤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거짓 후퇴(feigned flight)입니다. 오래 함께 싸운 노르만 기사 무리는 이런 어려운 움직임을 함께 해낼 수 있었습니다.

저녁이 올 무렵 해럴드가 쓰러졌습니다. 그의 형제 레오프윈과 기스도 함께 죽었습니다. 지휘자를 잃은 잉글랜드군은 무너져 달아났고, 맘즈베리에 따르면 그 도주는 밤까지 이어졌습니다.

방패벽과 기사: 두 군대의 무기

두 군대의 갑옷과 무기는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눈에 띄는 차이는 말과 활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사람들은 말을 타고 싸움터까지 왔지만 언제나 걸어서 싸웠습니다.

잉글랜드군 한가운데에는 하우스칼(housecarl)이 있었습니다. 왕을 가까이 섬기는 잘 훈련된 정예 보병입니다. 이들이 즐겨 든 무기는 자루가 긴 전투 도끼였는데, 바이킹에게서 왔다고 해서 데인 도끼(Danish axe)라고도 불렀습니다. 두 손으로 휘둘렀지만 가볍고 균형이 좋아서, 한 손으로 쓰고 다른 손에 방패를 들 수도 있었습니다.

방패벽(shield wall)은 병사들이 바짝 붙어 서서 방패를 맞물려 만든 벽입니다. 노르만 기사가 주로 든 연 모양의 긴 방패도, 일부 잉글랜드 병사가 든 더 단단하고 무거운 둥근 나무 방패도 이렇게 맞물릴 수 있었습니다. 지붕의 기와처럼 하나하나가 겹쳐 한 장의 면을 이루는 모습입니다. 실제로는 사람이 들고 서 있는 벽이라서, 대열이 흐트러진 자리에는 곧 틈이 생깁니다.

노르만 쪽은 활이 많았습니다.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윌리엄 군대의 궁수를 1,000명 넘게 추정하며, 윌리엄이 높이 쏘라고 명령한 뒤로 화살이 방패벽 뒤 머리 위로 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나오는 잉글랜드 궁수는 한 명뿐입니다.

석궁(crossbow)도 있었습니다. 1066년에는 비교적 새로운 무기로, 보통 활보다 훨씬 느리게 쐈지만 화살이 방패를 꿰뚫을 수 있었습니다. 태피스트리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쇠 날 창을 들었고, 찌르거나 투창처럼 던졌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말 위에서 창과 칼, 방패로 싸우는 기사였습니다. 헤이스팅스에서 기사는 노르만의 비밀 무기였고, 잉글랜드에서는 그런 군대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기사들은 어릴 때부터 말 위 싸움을 익혔고, 긴 창(lance)으로 방패벽의 틈을 찌르거나 그 창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숫자와 이야기는 자료마다 다르다

헤이스팅스는 기록이 많은 전투입니다.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바이외 태피스트리와 푸아티에의 기욤을 주 사료로 꼽고, 둘이 합쳐 다른 어떤 중세 전투보다 많은 정보를 주지만 세부는 여전히 불분명한 곳이 많다고 봅니다. 숫자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무엇자료값
노르만 함대의 배연대기 작가 한 명(잉글리시 헤리티지가 전함)3,000척
노르만 함대의 배잉글리시 헤리티지700~1,000척
노르만 함대의 배바이외 박물관약 1,000척
노르만 군대잉글리시 헤리티지(함대 설명), 바이외 박물관약 8,000명
두 군대 각각잉글리시 헤리티지가 전하는 오늘 학자들의 견해5,000~7,000명
실어 나른 말잉글리시 헤리티지2,000마리 넘게
실어 나른 말바이외 박물관5,000마리
노르만 기병잉글리시 헤리티지(전장 역사)기사와 종자 2,000~3,000
노르만 기병잉글리시 헤리티지(무기 설명)기사 1,000~2,000

3,000척에는 잉글리시 헤리티지가 직접 단서를 붙였습니다. 연대기 작가들은 자주 부풀렸다는 것입니다. 같은 기관 안에서도 쪽마다 기병 수가 다르니, 한 값만 골라 외우기보다 범위로 읽는 편이 안전합니다.

네 칸짜리 비교 도표. 노르만 함대의 배: 한 연대기 작가 3,000척, 잉글리시 헤리티지 700~1,000척, 바이외 박물관 약 1,000척. 군대 크기: 잉글리시 헤리티지 함대 설명과 바이외 박물관 모두 노르만군 약 8,000명, 잉글리시 헤리티지가 전하는 오늘 학자들의 견해는 양쪽 각각 5,000~7,000명. 실어 나른 말: 잉글리시 헤리티지 2,000마리 넘게, 바이외 박물관 5,000마리. 노르만 기병: 잉글리시 헤리티지 전장 역사 쪽 기사와 종자 2,000~3,000, 무기 설명 쪽 기사 1,000~2,000. 막대는 범위, 점은 한 값, 화살표는 '넘게'를 뜻한다. 사상자 수는 출처에 없어 넣지 않았다는 메모가 있다
같은 전투, 다른 숫자. 자료별 값을 한 축에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해럴드의 죽음도 이야기가 갈립니다.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의 교육 자료에도 '전설'이라는 말과 함께 나옵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가장 유명한 장면 하나에서 해럴드는 얼굴에 화살을 맞은 모습입니다. 맘즈베리는 화살이 머리를 꿰뚫었다고 적었고,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만 남겼습니다.

싸움터의 자리를 두고도 다른 주장이 나왔습니다. 배틀에서 남쪽으로 약 3마일인 크로허스트(Crowhurst)와 북쪽으로 약 1마일인 콜드벡 힐(Caldbec Hill)이 그 후보입니다. 이 주장은 12세기 후반, 전투 뒤 100년 넘게 지나 쓰인 배틀 수도원 연대기를 수사들이 꾸며 낸 이야기로 봅니다.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1086년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윌리엄 부고가 이미 "정확히 그 자리"에 수도원을 지었다고 적은 점을 들어, 지금 자리에 있다고 볼 근거가 충분하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래도 풀리지 않은 물음이 남아 있습니다. 수도원 터에서는 전투와 이어진 유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2013년 지형 분석은 수도원 남쪽 땅이 개울로 갈리고 습했을 것이라 보고, 윌리엄이 헤이스팅스에서 이어지는 높은 능선을 따라 남동쪽에서 다가왔을 가능성을 듭니다. 그렇다면 거의 모든 그림이 그려 온 남북 방향의 배치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도원과 둠즈데이로 남은 것

전투가 끝나도 윌리엄은 곧바로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헤이스팅스로 돌아가 사람들이 굴복하기를 기다렸고, 아무도 오지 않자 지나는 땅을 약탈하며 버크햄스테드(Berkhamsted)까지 갔습니다. 그곳에서 알드레드 대주교와 에드거, 에드윈·모르카르 백작, 런던의 유력자들이 굴복했습니다. 1066년 12월 25일 윌리엄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했고, 1087년 죽을 때까지 다스렸습니다.

윌리엄은 1071년 무렵 싸움터에 배틀 수도원(Battle Abbey)을 세웠습니다. 전투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고 정복 때 흘린 피를 속죄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첫 수사들이 자리가 마땅치 않다고 반대했지만, 윌리엄은 성당의 높은 제단을 해럴드가 죽은 자리에 두라고 고집했습니다. 그 성당은 1094년에 축성됐습니다.

잉글랜드의 윗자리도 바뀌었습니다. 윌리엄의 승리로 노르만 지배층이 들어섰고, 커먼 로(common law)도 이 일을 계기로 도입됐습니다. 노르만의 지배를 드러내려는 큰 건축이 뒤따라 성과 대성당, 수도원, 교회가 곳곳에 섰습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오도 주교와 윌리엄이 나라 곳곳에 성을 짓고 가엾은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기록했습니다.

20년 뒤의 장부도 그 변화를 보여 줍니다. 1085년 윌리엄은 돈이 모자랐고, 노르만끼리 받은 땅을 두고 다툼이 생기자 전국 조사를 명했습니다. 그 결과가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으로, 13,000곳 넘는 장소가 나옵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교육 자료는 2,000명의 색슨이 가졌던 땅 대부분이 1086년에는 200명의 노르만 귀족 것이 됐다고 정리합니다.

이야기를 실로 남긴 것도 있습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는 이름과 달리 아마 천에 열 가지 빛깔의 양모 실로 놓은 자수로, 길이가 70 m 가까이 되고 높이는 50 cm입니다. 정복왕의 이복동생 오도 주교가 주문했을 것으로 보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라 있습니다. 바이외 박물관이 공사하는 동안 프랑스 정부가 2026년 9월부터 2027년 7월까지 런던 대영박물관 전시에 빌려준다고 박물관은 밝혔습니다.

싸움터도 놀랄 만큼 온전한 모습으로 남았습니다. 영국 정부의 전장 자료에는 "Battle of Hastings 1066"이 1995년 6월 6일을 시작일로 올라 있습니다.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1066년은 잉글랜드에 대한 마지막 성공한 침공의 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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