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년 10월 25일 금요일 아침, 프랑스 북부 아쟁쿠르(Azincourt) 근처의 들판에서 두 군대가 서로를 바라본 채 서 있었습니다. 한쪽은 노르망디의 항구를 빼앗고 칼레로 가던 잉글랜드 왕 헨리 5세(Henry V)의 군대였고, 다른 쪽은 그 길을 막으려고 모인 프랑스군이었습니다. 그날 싸움은 잉글랜드의 빠른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싸움이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덕분에 백년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가 됐고, 그만큼 다툼도 많습니다. 프랑스군은 정말 잉글랜드군의 몇 배였을까요? 진흙은 승패에 얼마나 무게를 더했을까요?
두 물음 모두 어느 기록을 믿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전투 뒤 30년 안팎에 완성된 프랑스 쪽 연대기, 잉글랜드 왕실의 계약서와 지급 기록, 오늘의 박물관 설명을 차례로 겹쳐 봅니다.
1415년, 헨리 5세가 바다를 건넌 까닭
뿌리는 80년 가까이 앞선 13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의 프랑스 땅을 침공했고, 두 왕국의 영토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1340년 에드워드는 아예 프랑스 왕위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싸움과 휴전이 오가는 긴 다툼, 백년전쟁의 시작입니다.
에드워드의 증손자 헨리 5세는 이 주장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그는 전쟁을 선포하고 1415년 8월부터 9월까지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아르플뢰르(Harfleur)를 포위했습니다. 사우샘프턴 대학교는 그해 가을의 뜻밖의 승리를 헨리가 프랑스를 꺾고 프랑스 왕위 주장을 내세운 일로 설명합니다.
군대를 모으는 방식은 오늘의 계약과 꽤 닮았습니다. 지휘관(captain)이라 불린 사람들이 왕과 계약을 맺어 정해진 수와 구성의 군사를 대기로 했고, 원정은 최대 12개월을 예정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인덴처(indenture) 제도라고 부릅니다. 1415년 원정의 계약 대부분은 그해 4월 29일 웨스트민스터에서 봉인됐고, 원본 상당수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계약서는 같은 내용을 두 번 쓴 뒤 가운데를 이빨 모양으로 잘라 왕과 지휘관이 한 쪽씩 가졌습니다. 우리 옛 부절(符節)이나 나무를 쪼갠 엄대처럼 두 조각을 맞대어 진짜인지 확인하는 방식입니다. 실제로는 사람이나 명령을 확인하는 데가 아니라 돈 계산에 썼다는 점이 다릅니다. 원정이 끝나면 두 쪽을 맞춰 보며 돈을 정산했고, 한쪽이 몰래 새로 써도 잘린 자국이 맞지 않았습니다.
잉글랜드 왕들이 이렇게 돈을 주는 계약으로 군사를 모은 데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14세기에 들어 봉건 의무만으로는 바다 건너 긴 원정에 필요한 병력을 댈 수 없게 됐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왕들도 군사에게 돈을 주었지만, 여전히 옛 봉건적 권한에 기대 군대를 불러 모았습니다.
프랑스 쪽에도 준비의 흔적이 문서로 남아 있습니다. 사우샘프턴과 레딩 대학의 연구 사업 Medieval Soldier는 1415년 6월 30일부터 10월 25일까지의 소집 기록 228건과 지급 영수증 343건을 모았습니다. 그 문서들에서는 9~10월 루앙에 군대가 꾸려지는 모습이 두드러지고, 부르고뉴의 공격을 걱정해 파리를 지키는 부대도 따로 보입니다.
바다를 건넌 배의 수도 다시 셈해졌습니다. 헨리의 함대는 오랫동안 외국 배 약 1,500척으로 여겨졌습니다. 사우샘프턴의 크레이그 램버트(Craig Lambert)는 함대가 약 700척이었고 대부분 잉글랜드 배였다고 봅니다. 외국 배를 약 250척 빌리고, 잉글랜드 상인의 배 약 400척을 징발했다는 계산입니다.
아르플뢰르에서 아쟁쿠르까지
아르플뢰르가 무너진 뒤의 길은 앙게랑 드 몽스트렐레(Enguerrand de Monstrelet)의 연대기에 자세히 나옵니다. 몽스트렐레는 캉브레 총독이자 프랑스 왕실 편에 선 사람이었고, 그의 연대기는 1447년까지 완성됐습니다. 전투를 직접 본 사람의 글은 아니지만, 사건 뒤 30년 안팎에 마무리된 프랑스 쪽 기록입니다.
헨리는 아르플뢰르에 중장 보병 500명과 궁수 1,000명을 수비대로 남겼습니다. 도시에서 15일을 머문 뒤 그는 칼레로 걸어가기로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연대기에 적힌 이때의 군사는 중장 보병 2,000명과 궁수 약 1만 3천 명,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사람입니다. 오늘 연구자들이 행정 기록으로 센 숫자와는 거리가 있는데, 이 차이는 뒤에서 따로 살펴봅니다.
길을 가로막은 것은 솜(Somme) 강이었습니다. 헨리는 70년 가까이 앞선 1346년, 에드워드 3세가 크레시 전투 때 건넌 블랑슈타크(Blanchetaque) 여울로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가 그 여울에 큰 병력을 두었다는 척후의 말을 듣고 길을 바꿨습니다. 10월 13일 일요일 그는 바이욀앙비뫼(Bailleul-en-Vimeu)에 묵었고, 강을 따라 건널 곳을 찾아 나아갔습니다.
프랑스군은 강 건너편에서 나란히 움직이며 여울을 지켰습니다. 잉글랜드군은 성 루가 축일 다음 날에야 베탕쿠르(Béthencourt)와 부아이엔(Voyennes) 사이의 여울로 강을 건넜습니다. 프랑스 왕은 생캉탱 사람들에게 그 여울에 말뚝을 박아 막으라고 명령했지만, 그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목요일인 10월 24일, 잉글랜드 척후는 프랑스군이 큰 무리를 지어 루시오빌(Rousiauville)과 아쟁쿠르 쪽에 자리 잡으러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헨리는 그 앞의 작은 마을 메종셀(Maisoncelles)에 군대를 묵게 했습니다. 프랑스군과는 화살이 세 번 날아갈 만한 거리였습니다. 잉글랜드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있었습니다.
프랑스 쪽에는 아직 오는 중인 군대도 있었습니다. 브르타뉴 공작이 6,000명을 이끌고 아미앵까지 와 있었고, 전투가 토요일까지만 미뤄졌어도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왕립무기고(Royal Armouries)는 이 장면을 칼레로 돌아가려던 헨리가 길을 막은 프랑스군에 가로막힌 것으로 정리합니다. 사우샘프턴 대학교의 앤 커리(Anne Curry) 교수는 이 전투가 실패한 원정 끝에, 포위전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잊기 쉽다고 말합니다.
10월 25일, 들판의 하루
금요일 아침 프랑스군은 세 무리로 섰습니다. 맨 앞 선봉에는 투구를 쓴 기사와 종자 약 8,000, 궁수 4,000, 석궁수 1,500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본대가, 맨 뒤에 남은 중장 보병으로 꾸린 후위가 섰습니다. 양옆에는 잉글랜드군의 옆구리와 궁수를 칠 날개 두 개를 따로 두었는데, 하나는 중장 보병 1,500, 다른 하나는 정예 800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까지 자리를 지키며 기다렸습니다. 몽스트렐레는 그들 가운데 지혜로운 몇 사람만이 맞붙는 싸움을 두려워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잉글랜드 쪽 배치는 나이 든 기사 토머스 어핑엄(Thomas Erpingham)이 맡았습니다. 궁수를 앞에, 중장 보병을 뒤에 세우고, 중장 보병과 궁수로 양쪽 날개를 만들었습니다. 말과 짐은 맨 뒤에 두었습니다.
궁수는 저마다 양 끝을 뾰족하게 깎은 말뚝을 자기 앞에 박았습니다. 헨리는 따로 궁수 약 200명을 트라므쿠르(Tramecourt) 마을 쪽으로 몰래 보내 프랑스 선봉 가까운 들판에 숨게 했습니다.
프랑스가 움직이지 않자 잉글랜드군이 먼저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몇 번 멈춰 숨을 고르며 함성을 질렀고, 숨어 있던 궁수들도 함성을 받으며 활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연대기 속 궁수는 적어도 1만 3천 명이었고, 그들은 힘껏, 되도록 높이 화살을 쏘아 올렸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투구 면갑에 화살이 맞지 않게 고개를 숙였고, 맞붙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왕립무기고는 이 대목을 "방어 전술을 공격적으로 썼다"고 풀이합니다. 말뚝 뒤에서 버티는 궁수는 본래 지키는 쪽의 무기인데, 헨리가 먼저 다가가 상대가 덤벼들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프랑스 기병 날개가 궁수를 깨뜨리러 나섰지만, 클뤼네 드 브라방(Clugnet de Brabant)이 이끈 800은 140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화살에 다친 말들은 날뛰며 자기편 선봉으로 달려들었습니다. 대열이 여러 곳에서 끊어졌고 사람과 말이 함께 땅에 쓰러졌습니다. 군대 전체가 막 곡식을 뿌린 땅 쪽으로 밀려났고, 겁에 질려 달아나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잉글랜드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궁수들은 활을 내려놓고 칼과 손도끼, 메, 빌훅(bill-hook)을 들고 뛰어들었습니다. 프랑스 왕의 부름을 받고 막 도착한 브라방 공작 앙투안은 무너진 선봉과 본대 사이로 뛰어들었다가 곧 쓰러졌습니다. 말을 탄 후위는 앞의 두 무리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몇몇 지휘관을 빼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잉글랜드가 우세를 잡고 포로를 여럿 잡았을 때 소식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프랑스 쪽 몇 사람과 농민 약 600명이 잉글랜드 왕의 짐을 덮쳐 상당 부분을 가져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몽스트렐레에 따르면 헨리는 프랑스군이 다시 싸움을 걸까 걱정했고, 그러면 포로들이 적을 도울 수 있다며 모두 포로를 죽이라고 나팔로 알렸습니다. 이 명령을 어떻게 볼지는 지금도 갈리는데, 마지막 소제목에서 다시 봅니다.
들판은 결국 잉글랜드 쪽에 남았습니다. 몽스트렐레는 잉글랜드 왕이 모든 계급을 합쳐 약 1,600명을 잃었고, 그 가운데 왕의 숙부 요크 공작이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헨리가 가까운 성의 이름을 묻자 아쟁쿠르라는 답이 돌아왔고, 그는 이 싸움을 그 이름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잉글랜드군은 그 뒤 막힘없이 칼레로 돌아갔습니다.
장궁, 판금 갑옷, 말뚝: 그날의 무기
두 군대는 짜임부터 달랐습니다. 왕립무기고에 따르면 1415년 중장 보병과 기사, 귀족은 잉글랜드군의 약 4분의 1이었지만 프랑스군에서는 4분의 3이 넘었습니다. 잉글랜드는 궁수의 군대였고, 프랑스는 온몸을 갑옷으로 감싼 사람들의 군대였습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 궁수의 무기는 장궁(longbow)이었습니다. 길이는 대개 약 1.8 m로 사람 키만 했고, 주로 주목(yew)으로 만들었습니다. 군용 화살은 24개씩 한 묶음으로 보관하고 나눠 주었습니다. 사거리는 약 229 m, 어쩌면 그 이상으로 여겨집니다.
장궁의 진짜 힘은 빠르기에 있었습니다. 장궁병은 1분에 화살 10~12발을 쏠 수 있었고, 석궁수는 2~3발이었습니다. 프랑스 쪽이 더 흔히 쓴 석궁은 느린 대신 더 강했습니다. 한쪽은 많이, 다른 쪽은 세게 쏘는 무기였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화살은 판금 갑옷(plate armour)을 뚫었을까요? 왕립무기고의 답은 생각보다 조심스럽습니다. 좋은 갑옷은 사람과 말 모두를 화살에서 꽤 잘 지켰고, 갑옷을 뚫은 화살은 아마 일부뿐이었으며 그것도 투구 옆처럼 얇은 곳이었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화살이 효과를 낸 것은 쏟아진 양 때문이었습니다.
판금 갑옷이 사람을 둔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흔한 오해입니다. 한 벌의 무게는 약 60~70 lb였지만 온몸에 나뉘어 실렸고, 입은 사람은 꽤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단단한 판은 비껴 맞는 공격을 흘렸고, 정면으로 세게 맞아야 뚫렸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힘을 쓰면 열에 지쳐 쓰러질 위험은 있었습니다.
궁수의 차림은 훨씬 가벼웠습니다. 두꺼운 웃옷과 투구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연대기 속 그날의 잉글랜드 궁수는 대부분 갑옷 없이 웃옷 차림이었고, 손도끼나 칼을 허리에 찼으며 맨발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궁수는 화살을 다 쏜 뒤 쓸 무기를 따로 지녔고, 중장 보병과 나란히 근접전 한가운데서 싸웠습니다.
새 무기도 조금씩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기록에는 아쟁쿠르에서 총에 맞아 죽은 잉글랜드 병사가 한 명 남아 있습니다. 헨리는 이 원정에 딘 숲(Forest of Dean)의 광부 부대도 데려갔습니다. 아쟁쿠르에서 싸운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터규는 당대 그림 속에서 도끼와 망치, 뾰족한 끝을 한 자루에 단 폴액스(pollaxe)를 들고 있습니다.
진흙 논쟁: 땅은 얼마나 중요했나
아쟁쿠르 이야기에는 진흙이 자주 나옵니다. 무거운 갑옷과 질척한 땅이 프랑스군을 무너뜨렸다는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글이 따라온 기록에서 진흙의 무게는 그보다 가볍습니다.
왕립무기고의 요약에서 진흙은 주인공이 아니라 덧붙은 조건입니다. 땅에 박은 말뚝의 보호를 받은 장궁병의 화살이 프랑스 중장 보병을 무너뜨렸고, 그들은 진흙 땅 때문에 "더" 불리했다는 문장입니다. 화살과 말뚝이 먼저이고, 진흙은 그 위에 얹혀 있습니다. 몽스트렐레의 연대기도 진흙이라는 낱말 대신, 무너진 프랑스군이 막 곡식을 뿌린 땅 쪽으로 밀려났다고만 적었습니다.
땅에 대해 더 또렷이 남은 것은 비좁음입니다. 연대기의 장면도 같습니다. 잉글랜드군이 바짝 다가오자 맨 앞줄과 창을 짧게 잡은 사람 말고는 프랑스 사람들이 손을 들어 맞설 수조차 없었습니다. 왕립무기고 역시 프랑스 사람들이 너무 붙어서 싸워 칼을 거의 쓸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비좁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이름난 사람들의 최후에서도 보입니다. 잉글랜드 선봉을 이끈 요크 공작은 프랑스 공격을 정면으로 받다 죽었는데, 싸우다 쓰러졌는지 위로 덮친 병사들 무게에 눌려 열과 숨 막힘으로 죽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오를레앙 공작은 시체 더미 밑에서 발견돼 포로가 됐습니다. 헨리 5세 자신도 프랑스 병사에게 베일 뻔했습니다.
이 비좁음은 숫자 논쟁과 곧바로 이어집니다. 앤 커리는 전장을 보면 주장된 만큼 많은 군사가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연구에는 전투가 벌어진 지형을 새로 살피는 일도 들어 있었습니다. 땅의 크기가 사람 수의 상한을 정한다는 생각입니다.
숫자 논쟁: 15만에서 1만 2천까지
몽스트렐레는 전투 전날 밤 프랑스군이 "족히 15만"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대열을 갖춘 프랑스군을 두고는 얼핏 보아 잉글랜드군의 여섯 배가 넘는다고 여겨졌다고 했습니다. 프랑스 쪽의 다른 연대기 작가 장 드 와브랭(Jean de Waurin)도 프랑스군을 잉글랜드군의 여섯 배로 적었습니다.
오늘날 흔히 도는 이야기는 그보다 작지만 여전히 차이가 큽니다. 지친 잉글랜드군 약 6,000~9,000이 프랑스군 1만 5천~2만 5천을 이겼다는 줄거리입니다. 프랑스가 5 대 1로 많았다는 말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앤 커리는 다른 길로 숫자에 다가갔습니다. 그 시대의 연대기만이 아니라, 그때까지 아무도 이렇게 맞춰 보지 않은 재정·행정 기록까지 꼼꼼히 살핀 것입니다. 2004년부터 그는 헨리의 1415년 군대에 있던 병사 약 8,000명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고, 2005년에 책으로 냈습니다.
그 결과 두 군대의 차이는 흔히 믿던 것보다 훨씬 작게 나왔습니다. 영국 연구평가(REF)에 제출된 사례는 프랑스군 약 1만 2천, 잉글랜드군 9,000으로 정리합니다. 2016년 사우샘프턴 대학교 소식에서 커리는 잉글랜드 8,500, 프랑스 약 1만 2천이라는 앞선 제안을 다시 언급했습니다. 같은 연구자의 숫자도 발표마다 조금씩 다른 셈입니다.
이 숫자는 반발도 불렀습니다. 커리 스스로 사람들이 프랑스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생각에 애착이 커서 논란이 됐다고 말합니다. 셰필드 대학교 학생 역사 잡지는 그의 결론이 이 시대 전문가들에게서도 적잖은 비판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몽스트렐레의 잉글랜드군 숫자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가 적은 아르플뢰르 출발 때의 중장 보병 2,000과 궁수 약 1만 3천은 오늘 연구자들이 기록으로 센 전체 원정군보다 많습니다.
셰필드의 글은 와브랭이 중세판 홍보 담당자가 아니었다고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기록으로 센 숫자에도 빈칸은 있습니다. 모든 문서가 남지는 않아서, 부대마다 크기와 구성을 다 맞추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망자는 더 어렵습니다. 프랑스 쪽 죽은 사람은 주로 연대기의 이름 목록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장 긴 몽스트렐레의 목록은 273명, 잉글랜드 연대기 『브루트(Brut)』의 가장 긴 목록은 38명입니다. 솔즈베리 시 기록에는 이름이 있는 92명과 이름 없는 3명의 목록이 있습니다. 목록마다 이름이 꽤 달라서, 어느 하나로 전체를 셀 수 없습니다.
잉글랜드의 손실은 몽스트렐레가 약 1,600명이라고 적었고, 왕립무기고는 프랑스 사상자가 잉글랜드보다 훨씬 많았다고만 설명합니다. 숫자 하나로 끝나지 않는 까닭은, 그 이름 하나하나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포로, 몸값, 셰익스피어: 남은 것
아쟁쿠르에서는 많은 프랑스 사람이 포로가 됐습니다. 오를레앙 공작과 부르봉 공작도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오를레앙 공작은 잉글랜드로 끌려가 런던탑을 비롯한 여러 성에서 25년을 보냈고, 1440년에야 풀려났습니다.
포로는 곧 돈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왕은 포로 몸값의 몫을 받을 권리가 있었고, 그래서 왕실 재정 기록에 누가 잡혀 몸값이 매겨졌는지가 남았습니다. 몸값을 받을 권리는 사고팔렸고, 실제 몸값은 보통 그 권리를 가진 사람이 왕실에 내야 할 몫의 세 배였습니다.
포로를 죽이라는 명령은 지금도 해석이 갈립니다. 몽스트렐레는 짐을 덮친 일 때문에 헨리가 그 명령을 내렸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이 명령으로 프랑스 포로가 한꺼번에 죽었다고 적고, 그 탓을 짐을 덮친 사람들에게 돌렸습니다. 그 사람들은 뒤에 부르고뉴 공작 장에게 벌을 받았습니다.
왕립무기고는 헨리 5세조차 이 명령으로 일부에서 비판을 받았다고 적습니다. 사우샘프턴의 레미 앙뷜(Rémy Ambühl)은 몸값 계약 약 100건을 살펴, 기사만이 아니라 여러 계층의 사람이 전투 뒤 몸값을 위해 붙잡혀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학살이 있었다면 높은 사람만 살리고 낮은 사람만 죽이는 식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승리는 곧장 평화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헨리는 1417년 노르망디를 정복하려고 다시 쳐들어갔습니다. 프랑스 왕 샤를 6세는 결국 잉글랜드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했고, 1420년 5월 21일 봉인된 트루아(Troyes) 조약으로 헨리는 프랑스의 후계자이자 섭정이 됐습니다. 그러나 1422년 샤를보다 조금 먼저 세상을 떠났고, 생후 9개월의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왕이 됐습니다.
프랑스 군사박물관(Musée de l'Armée)은 전시 「기사와 사석포: 아쟁쿠르에서 마리냐노까지, 1415~1515」에서 아쟁쿠르를 봉건 군대의 끝을 알린 전투로 소개했습니다. 그 뒤 100년 동안 군대와 전술, 군 제도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이 그 전시의 줄기였습니다. 아쟁쿠르의 들판을 군대가 바뀌는 100년의 출발점으로 본 셈입니다.
오늘 우리가 떠올리는 아쟁쿠르는 대부분 셰익스피어의 1599년 희곡 『헨리 5세』에서 왔습니다. 신문이 1757년부터 이 전투를 기념할 때 실은 것도 그 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대사였습니다. 1·2차 세계대전 때는 희곡 속 연설이 군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쓰였습니다.
이야기가 커지면서 신화도 붙었습니다. 프랑스가 잉글랜드 궁수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을러대자 궁수들이 보란 듯이 손가락을 치켜들었고, 그것이 브이(V) 손짓의 시작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커리는 그 시대 기록이 없어 거의 확실히 20세기 도시 전설이라고 봅니다.
헨리의 군대 대부분이 웨일스 사람이었다는 생각도 틀렸습니다. 소집 명부에는 웨일스 궁수 500명과 소수의 중장 보병 이름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조상이 아쟁쿠르에서 싸웠다는 집안 이야기도 많습니다. 그 이름에 위신이 따른다고 여겨 근거 없는 주장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커리가 소집 명부와 원정의 재정 기록으로 만든 데이터베이스는 이런 주장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줍니다. 600년도 더 전 들판의 진흙과 숫자를 두고 다툴 수 있는 것도, 그 이름들이 문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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