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5년 5월 22일, 잉글랜드의 세인트올번스(St Albans)에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싸움터는 들판이 아니라 거리였고, 상대는 잉글랜드 왕 헨리 6세(Henry VI)의 일행이었습니다. 이 거리 싸움에서 화살 하나가 왕의 목에 상처를 냈습니다.
신하가 왕의 행렬을 막아선 일은 어떻게 30년 넘게 이어진 내전으로 번졌을까요? 이 글은 오늘날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이라 부르는 이 다툼이 왜 시작됐고, 왕관이 어떤 차례로 옮겨 다녔으며, 어떻게 끝났는지를 따라갑니다.
뼈대는 영국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가 공개한 당시 기록과 대학의 역사 자료입니다. 땅속에서 나온 탄환과 배지도 함께 봅니다. 숫자가 자료마다 다른 곳에서는 어느 자료의 숫자인지 밝힙니다.
아기 왕과 잃어버린 프랑스
다툼의 뿌리는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1399년 랭커스터 공작 헨리 볼링브로크가 정변을 일으켜 리처드 2세를 몰아내고 헨리 4세가 됐습니다. 그 뒤 왕위는 아들 헨리 5세에게 이어졌습니다.
헨리 6세는 1421년 12월 6일 윈저성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지 아홉 달 만에 아버지 헨리 5세가 죽어, 갓난아기가 왕이 됐습니다. 1422년 9월 1일부터 그의 이름으로 왕권이 행사됐고, 오랜 섭정 기간이 이어졌습니다.
그사이 프랑스 쪽 사정이 무너졌습니다. 1450년 노르망디를 잃었고, 프랑스에 있던 잉글랜드 땅은 칼레 둘레만 남았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학부 자료는 이때 큰 귀족들이 왕이 실제로 다스리고 있다고 더는 꾸밀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헨리 6세는 거듭 심한 정신 질환을 앓았습니다. 왕이 제 몫을 하지 못하자 두 무리가 갈라섰습니다. 서머싯 공작을 중심으로 한 궁정 쪽은 다른 이들이 왕의 이름으로 비공식적으로 다스리자고 했고, 요크 공작 리처드 쪽은 왕 대신 다스릴 공식 회의를 세우자고 했습니다.
여기에 왕비 마거릿 오브 앙주(Margaret of Anjou)가 한쪽 편을 들면서 왕도 그쪽에 서게 됐습니다. 그러자 다른 쪽은 원하든 원치 않든 왕 자신과 맞서는 처지가 됐습니다.
세인트올번스의 거리 싸움
1455년 왕이 병에서 회복하자, 요크 공과 그 무리는 곧 반역죄로 몰릴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5월 22일 레스터로 가던 왕의 일행을 가로막았습니다.
세인트올번스 거리에서 요크 쪽은 왕의 수행원 가운데 자기들의 적을 골라 죽였습니다. 왕이 목에 화살을 맞아 다친 것도 이때였습니다. 요크 공은 왕을 붙잡아 런던으로 데려갔고, 곧 호국경(Protector of England)으로 다시 정부를 맡았습니다.
이 싸움을 본 사람이 남긴 기록이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습니다. 문서보관소는 이 목격담을 영어로 쓰인 가장 이른 전쟁 보도 가운데 하나로 소개합니다. 1480년대까지 이어질 더 큰 전투와 복수의 고리가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왕좌를 요구한 요크 공
세인트올번스 뒤의 화해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459년 "악마의 의회(Parliament of Devils)"는 요크 공과 지지자들에게 사권 박탈(attainder)을 내렸습니다. 땅을 빼앗고 반역자로 선언하는 벌입니다.
싸움이 커졌지만 결판은 나지 않았습니다. 1460년 7월 노샘프턴에서 요크 공이 헨리 6세를 붙잡았는데도, 헨리는 여전히 왕이었습니다.
1460년 10월 10일, 요크 공은 마침내 왕위를 정면으로 요구했습니다. 자기 혈통이 헨리 6세보다 왕위에 더 나은 근거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판사들은 판단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타협안은 헨리 6세를 평생 왕으로 두되 다음 왕은 요크 공으로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왕세자는 상속에서 빠졌습니다. 이 합의는 석 달밖에 가지 못했습니다. 싸움이 다시 붙었고, 요크 공은 1460년 12월 30일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죽었습니다.
눈 속의 타우턴
요크 공이 죽자 헨리 6세의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1461년 2월 두 번째 세인트올번스 싸움에서 요크 쪽 군대를 또 이겼지만, 런던이 성문을 닫자 북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사이 요크 공의 맏아들 에드워드가 웨일스 접경에서 올라왔습니다. 런던은 그에게 성문을 열었고, 그는 3월 4일 스스로 왕을 선포했습니다. 에드워드 4세(Edward IV)입니다.
결판은 3월 29일 요크셔의 타우턴(Towton)에서 났습니다. 랭커스터 쪽과 요크 쪽이 눈 속에서 맞붙었고, 에드워드가 이겼습니다. 헨리 6세는 스코틀랜드로 달아났고, 에드워드는 다툼 없는 왕이 됐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싸웠을까요? 영국 국립문서보관소는 "어쩌면 6만 명"이 영국 역사상 가장 큰 지상 전투에 나섰고 약 2만 8천 명이 죽었다고 적습니다. 오픈 유니버시티의 David Grummitt는 참가 7만 5천, 사상 2만 8천이라는 숫자가 자주 인용되지만 그럴 법하지 않다고 봅니다. 실제로 싸운 사람은 훨씬 적었다는 것입니다.
타우턴은 흔히 잉글랜드 역사에서 가장 크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꼽힙니다. 그래도 정확한 머릿수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킹메이커와 두 번 왕이 된 사람들
에드워드 4세의 왕좌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1464년에는 북쪽에서 랭커스터 쪽이 공격해 와 다시 싸워야 했습니다.
에드워드는 랭커스터 쪽 과부 엘리자베스 우드빌(Elizabeth Woodville)을 왕비로 골랐습니다. 이 결혼으로 프랑스와 혼인 동맹을 맺으려던 계획이 틀어졌습니다. 왕이 왕비 집안에 자리를 나눠 주자, 그의 큰 동맹자였던 "킹메이커(kingmaker)"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밀려났습니다.
헨리 6세를 바라는 사람도 아직 있었습니다. 1468년 토머스 포탈렌이라는 사람은 랭커스터 왕을 되돌리려는 군대에 2파운드를 내겠다고 서약했다가 반역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1469년 반란이 일어나 에드워드 4세의 군대가 밴버리 근처에서 졌습니다.
곧 워릭 백작이 헨리 6세와 손을 잡았습니다. 에드워드는 왕위에서 쫓겨나 네덜란드로 달아났고, 헨리 6세가 다시 왕이 됐습니다.
에드워드는 1471년 봄에 돌아왔습니다. 바닛(Barnet)과 튜크스베리(Tewkesbury)에서 헨리 6세의 편을 잇달아 이겼습니다. 헨리 6세는 1471년 5월 21일 런던탑에 갇힌 채 죽었고, 국립문서보관소는 그가 탑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적습니다.
리처드 3세와 보즈워스
에드워드 4세의 두 번째 치세는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동맹자들의 도움으로 대체로 평화로웠습니다. 그런데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가 뜻밖에 죽으면서 다시 권력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글로스터 공은 호국경이 됐고, 에드워드 4세의 자녀가 서자라고 선언했습니다. 에드워드 4세의 아들 에드워드 5세(Edward V)와 그 동생은 런던탑 안에서 사라졌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 기록으로 1483년 6월 26일 글로스터 공이 리처드 3세(Richard III)가 됐고, 7월 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했습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리처드의 옛 동맹자 버킹엄 공작이 맞섰습니다. 국새(Great Seal) 없이 다니던 리처드는 권위가 약해져 있었고, 국새를 보내라는 문서에 버킹엄을 꾸짖는 메모를 직접 덧붙였습니다. 반란은 실패했지만, 국립문서보관소는 이 반란이 헨리 튜더(Henry Tudor) 승리의 밑그림이 됐다고 봅니다.
프랑스에서 여러 해 망명하던 헨리 튜더는 1485년 8월 밀퍼드 헤이븐(Milford Haven)에 내렸습니다. 8월 22일 보즈워스(Bosworth)에서 그의 작은 반란군이 훨씬 큰 리처드 3세의 군대와 맞섰고, 리처드는 이 싸움에서 죽었습니다.
리처드의 시신은 레스터의 그레이 프라이어스 수도원에 묻혔습니다. 유해는 최근 현대식 주차장 밑에서 다시 발견됐고, 2015년 레스터 대성당의 새 무덤에 다시 묻혔습니다.
땅속에서 나온 무기와 배지
보즈워스 전투는 정확히 어디서 벌어졌을까요? 그 자리를 찾으려고 문헌, 지형, 현장 조사를 5년 동안 함께 한 것이 보즈워스 전쟁터 조사(Bosworth Battlefield Survey)입니다. 레스터셔 주의회 박물관이 그 출토품을 맡고 있습니다. 금속 탐지기로 넓은 땅을 훑은 끝에, 전투가 앰비언 언덕(Ambion Hill)에서 남서쪽으로 1마일쯤 떨어진 펜 레인(Fenn Lane) 양쪽에서 벌어졌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둥근 탄환 34개입니다. 중세 전쟁터에서 나온 포탄 무리로는 가장 큽니다. 굵기가 여러 가지인 납 탄환으로, 손에 들고 쏘는 총의 탄부터 큰 포의 탄까지 섞여 있습니다. 화약 무기가 이 전쟁터에 있었다는 흔적입니다.
작은 배지들도 나왔습니다. 길이가 29 mm밖에 안 되는 은도금 멧돼지 배지는 2009년에 발견됐습니다. 멧돼지는 리처드 3세 집안의 상징이었고, 도금한 은이라 왕 가까이 있던 높은 신분의 사람이 달았을 것으로 봅니다. 이 배지가 리처드가 마지막으로 싸운 자리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배지를 리버리 배지(livery badge)라고 합니다. 누구를 섬기는지 몸에 달아 보여 주는 표입니다. 조사에서는 독수리 모양의 은도금 리버리 배지도 나왔는데, 레스터 대학의 Kevin Schürer는 이것을 에드워드 4세의 서자 아서 플랜태저넷의 매로 봅니다. 다만 아서가 보즈워스에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리버리는 배지만이 아니라 옷이기도 했습니다. 장미전쟁의 한 싸움터는 19세기에 "루즈코트 필드(Losecote Field)"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렸습니다. 달아나던 반란군이 붙잡히지 않으려고 리버리 웃옷(coat)을 벗어 던진 일에서 온 이름입니다.
중세 잉글랜드 보병이 즐겨 든 무기로는 빌(bill)이 있습니다. 가지치기용 농기구에서 나온 긴 자루 무기로, 왕립 무기고 박물관(Royal Armouries)은 15세기 말의 빌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첫 싸움인 세인트올번스에서 왕을 다치게 한 것은 화살이었고, 마지막 큰 싸움인 보즈워스의 땅에는 총과 포의 탄환이 남았습니다. 한 전쟁 안에 활과 화약 무기가 함께 있었던 셈입니다.
튜더 장미와 전쟁의 끝
보즈워스에서 이긴 헨리는 헨리 7세(Henry VII)가 됐고, 1485년 10월 30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했습니다. 그는 어머니 쪽으로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의 후손이라고 내세웠습니다. 1486년 1월에는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 오브 요크(Elizabeth of York)와 결혼해 랭커스터와 요크 두 가문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그래도 싸움이 바로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요크 쪽 지도자들은 램버트 심널이라는 왕위 사칭자를 내세워 헨리를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1487년 6월 16일 스토크 필드(Stoke Field) 전투가 그 결정적인 싸움이었고, Battlefields Trust는 이 전투를 장미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장미전쟁"은 뒤에 붙은 이름입니다. 요크 가문의 흰 장미와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라는 두 문장(紋章) 배지에서 온 이름입니다. 그런데 케임브리지 대학 자료는 실제 싸움에서 이 장미 무늬가 비교적 적게 쓰였다고 덧붙입니다. 보즈워스 땅속에서 나온 것도 장미가 아니라 멧돼지와 새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새 장미가 생겼습니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두 무리를 하나로 묶은 튜더 가문이 새 왕조의 상징으로 튜더 장미를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가운데는 흰 꽃잎, 바깥은 붉은 꽃잎인 장미입니다. 헨리 7세가 묻힌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성모 예배당에도 내리닫이 쇠창살(portcullis), 매와 족쇄와 함께 이 튜더 장미가 새겨져 있습니다.
1455년의 거리 싸움에서 1487년의 스토크까지 30년 남짓 동안, 잉글랜드의 왕위는 다섯 사람에게 차례로 넘어갔고, 그 가운데 헨리 6세와 에드워드 4세는 두 번 왕이 됐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의 표현대로, 공공연한 싸움을 끝낸 사람은 헨리 7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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