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9월 17일 앤티텀(Antietam) 전투가 벌어진 들판 북쪽에는 노스 우즈(North Woods)라는 숲이 있었습니다. 오랜 뒤 고고학자들이 그 숲 면적의 25%를 금속 탐지기로 훑었고, 군사 유물 317점을 찾았습니다. 그 가운데 217점이 총과 탄 같은 소화기(small arms) 유물이었습니다. 둥근 납 구슬이 있었고, 끝이 뾰족하고 밑동이 빈 원뿔꼴 탄도 있었습니다.

뒤쪽의 탄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미니에 탄(Minié ball)입니다. 남북전쟁(1861~1865) 이야기에는 이 탄과 강선 소총(rifled musket)이 자주 등장하고, 전쟁의 엄청난 사상자를 설명하는 열쇠로 꼽히기도 합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이 글은 그 물음을 두 갈래로 나눠 봅니다. 먼저 총열 안의 홈과 탄의 모양이 무엇을 바꾸었는지를 보고, 그다음 사상자 숫자와 역사가들 사이의 논쟁을 봅니다.

활강총과 강선: 알고도 못 쓴 기술

총열 안쪽이 매끈한 총을 활강총(smoothbore)이라고 합니다. 총열 안쪽에 나선 모양의 홈을 판 것이 강선(rifling)입니다. 홈을 따라 탄이 돌면서 날아가면 더 멀리, 더 곧게 갑니다.

팽이가 돌 때 쓰러지지 않는 것을 떠올리면 됩니다. 실제 탄은 제자리에서 도는 팽이와 달리 빠르게 날아가므로, 이 비유는 "돌면 자세가 덜 흔들린다"는 데까지만 맞습니다.

이 원리는 수백 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사냥총에는 대개 강선이 있었고, 18세기의 몇몇 군대는 소총만 든 특수 연대를 따로 두었습니다. 그런데도 보병의 주력 무기는 1850년대까지 활강 머스킷(musket)이었습니다.

까닭은 장전에 있었습니다. 그 무렵의 군용 소총은 총구로 탄을 넣는 전장식(muzzleloader)이었습니다. 강선을 물 만큼 큰 탄은 총구로 밀어 넣기가 어려웠습니다.

몇 번 쏘고 나면 흑색 화약 찌꺼기가 홈에 쌓여, 닦지 않고는 다시 장전할 수 없었습니다. 빠르게 장전하고 오래 쏘아야 하는 군대에서 소총은 특수한 쓰임에 머물렀습니다.

활강 머스킷으로 싸우는 방식도 이 한계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포트 스콧 국립사적지(Fort Scott National Historic Site)의 교육 자료는 활강총의 최대 사거리를 250야드로, 특정 표적을 맞힐 수 있는 거리를 80야드 안으로 적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어깨를 맞대고 줄을 섰고, 한꺼번에 많은 탄을 날려 보내는 것을 노렸습니다.

불을 붙이는 장치도 이 무렵 바뀌었습니다. 1600년대 초에 나온 수석식(flintlock)은 부싯돌 불꽃으로 화약에 불을 붙였는데, 불발이 잦았습니다. 작은 구리 뇌관(percussion cap)을 쓰는 뇌관식은 흔히 영국인 조슈아 쇼(Joshua Shaw)의 발명으로 여겨지고, 그는 1822년 미국 특허를 받았습니다. 정규군은 남북전쟁 무렵 뇌관식을 갖췄지만, 일부 의용군 부대는 전쟁 초에 아직 수석식을 들었습니다.

세 칸으로 나눈 개념 도표. 첫 칸은 활강 머스킷으로, 매끈한 총열 안에 총열보다 조금 작은 둥근 탄이 있고 탄 둘레에 틈이 있다. 장전은 빠르지만 홈이 없어 탄이 돌지 않고, 겨누어 맞히는 것은 가까운 거리뿐이다. 둘째 칸은 예전의 군용 소총으로, 홈 파인 총열에 꽉 끼는 둥근 탄이 있어 밀어 넣기 어렵고 몇 번 쏘면 화약 찌꺼기가 홈에 쌓인다. 셋째 칸은 미니에 탄을 쓰는 강선 머스킷으로, 밑동이 빈 원뿔꼴 탄이 쉽게 들어가고 발사 때 가스가 빈 밑동을 밀어 벌려 홈을 물고, 홈이 탄을 돌린다. 아래에 미 국립공원청 설명을 바탕으로 한 개념도이며 실제 무기 도면이 아니라는 메모가 있다. 축척과 치수는 없다
활강총, 예전 소총, 미니에 탄을 쓰는 강선 머스킷의 차이 (도표)(도표)

미니에 탄: 밑동이 벌어지는 탄

막힌 곳을 푼 것은 탄의 모양이었습니다. 미니에 탄은 1848년 프랑스군의 클로드 에티엔 미니에(Claude Etienne Minié) 대위가 내놓은 원뿔꼴 납 탄입니다. 포트 스콧 국립사적지 자료처럼 시기를 1840년대로만 적은 곳도 있습니다.

이 탄의 비밀은 밑동에 있습니다. 밑동이 비어 있어서, 총을 쏘면 화약 가스가 그 빈 곳을 밀어 밑동을 바깥으로 벌립니다. 벌어진 밑동이 강선의 홈을 물고, 가스가 탄 옆으로 새어 나가는 것도 막습니다.

총구로 밀어 넣기 어렵던 문제가 이렇게 풀렸습니다. 벌어지는 탄은 총열을 지나가며 홈을 닦아 내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이 탄을 다듬은 사람은 하퍼스페리 조병창의 제임스 H. 버턴(James H. Burton)입니다. 그는 1849년 대리 수석 조병공이 되었고, 그 뒤 4년 동안 미니에 탄의 여러 설계를 실험했습니다. 단단한 금속 마개로 탄을 벌리는 총열도 설계했지만, 결국 더 잘 듣는 빈 밑동 탄을 만들었습니다.

1855년 미 육군은 버턴이 고친 설계를 채택했습니다. 그가 남긴 도면은 1986년 버지니아주 윈체스터의 한 집을 고치다가 지하 공간에서 나왔습니다.

버턴의 그 뒤 행로는 이 기술이 어디로 퍼졌는지 보여 줍니다. 그는 1855년 6월 영국 엔필드 왕립 소화기 제작소(Royal Small Arms Manufactory)의 수석 기술자로 5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전쟁이 터진 1861년 6월에는 남부 리치먼드 조병창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리치먼드 조병창의 기계 상당수는 그해 6월 남군이 버턴의 지휘로 하퍼스페리에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1861년 12월 남군 중령이 되어 남부의 조병창 전체를 맡았습니다.

스프링필드와 엔필드: 전쟁의 표준 소총

미니에 탄에 맞춰 강선을 판 첫 미국 화기는 M1855 스프링필드 강선 머스킷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메이너드 테이프 뇌관(Maynard tape primer) 장치가 달려 있었는데, 자주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병사들 대부분은 손으로 뇌관을 끼워 썼습니다.

그 뒤를 이은 M1861 스프링필드는 전쟁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보병 소총이 되었습니다. 이 총은 반동이 덜하고 균형이 좋았습니다. 숙련된 손에서는 1분에 세 번 쏠 수 있었고, 구경은 .58이었습니다.

남군이 가장 많이 쓴 어깨총은 영국에서 만든 1853년식 엔필드(Enfield)였습니다. 구경은 .577로 스프링필드와 거의 같았습니다. 엔필드는 약 90만 정이 들어왔고 대부분 남부가 들여왔지만, 많은 수가 북부의 봉쇄에 잡히거나 부서졌습니다.

남군이 둘째로 많이 쓴 것은 리치먼드 소총이었습니다. M1855를 거의 그대로 베낀 총으로, 하퍼스페리에서 가져온 기계와 재료로 리치먼드 조병창과 다른 남부 공장이 3만 정 넘게 만들었습니다.

남부의 출발점은 북부와 많이 달랐습니다. 전쟁 초 남부 조병고에 있던 근대식 어깨총은 약 17만 5천 정이었고, 그 가운데 약 14만 정이 활강식이었습니다. 근대식 무기를 만드는 설비와 원료도 대부분 공업화된 북부에 있었습니다. 남부는 제조, 수입, 그리고 전장에서 거둔 무기로 모자란 것을 채웠습니다.

전장에 남은 탄: 고고학이 보여 주는 것

다시 앤티텀의 노스 우즈입니다. 전투 기록으로는 이 숲에 북군만 있었고 남군은 남쪽으로 약 400야드 떨어진 밀러 농장 쪽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숲에서 나온 쏘아진 탄은 모두 남군 쪽에서 날아온 것으로 봅니다.

그 탄 가운데 .69 구경 둥근 탄이 있었습니다. 낡은 활강 머스킷용 탄인데, 그 총의 유효 사거리는 약 100야드였습니다. 그래서 남군이 기록보다 숲에 더 가까이 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 나옵니다.

탄의 종류는 보급 사정도 보여 줍니다. 숲의 유물로 보면 북군은 스프링필드와 엔필드에 쓰는 원뿔꼴 미니에 탄을 더 넉넉히 받았고, 남군은 활강 머스킷의 둥근 탄에 더 기댔습니다. 남군이 쏜 미니에 탄 가운데 많은 수는 북군이 만든 것일 수 있습니다. 앤티텀 바로 앞서 하퍼스페리의 북군 수비대를 잡은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의 부대가 거둔 보급품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숲에서는 사람이 씹은 탄도 나왔습니다. 이런 탄은 흔히 아픔을 견디려던 부상병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무기들이 숫자이기 전에 사람의 몸에 닿았다는 것을 땅속의 작은 납덩이가 보여 줍니다.

전장식 소총에는 다른 문제도 있었습니다. 게티즈버그(Gettysburg) 전투 뒤 전장에서 거둔 27,574정 가운데 바르게 장전된 것은 약 6,000정이었습니다. 12,000정에는 3~10발이 들어 있었고, 한 정에는 23발이 들어 있었습니다.

싸움 중에 장전한 것을 잊거나 불발을 발사로 여겨 거듭 넣은 결과입니다. 이 숫자로 양쪽 병사의 3분의 1이 제대로 쏘지 못하는 총을 들고 있었다는 추정이 나왔습니다.

사상자 숫자를 읽는 법

국립공원청은 북군 사상자를 642,427명, 남군 사상자를 483,026명으로 적습니다. 북군 쪽 항목은 전사 110,100, 병 224,580, 전투 부상 275,174, 포로 30,192입니다. 남군 쪽은 전사 94,000, 병 164,000, 전투 부상 194,026, 포로 31,000입니다. 어느 쪽이든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병으로 잃은 사람이 많습니다.

미 국립공원청이 적은 남북전쟁 사상자 나눔 막대 도표. 북군 합계 642,427: 전사 110,100, 병 224,580, 전투 부상 275,174, 포로 30,192. 남군 합계 483,026: 전사 94,000, 병 164,000, 전투 부상 194,026, 포로 31,000. 막대는 축척대로다. 아래 메모: 북군의 항목을 더하면 640,046으로 적힌 합계보다 조금 적다. 사상자는 죽음, 부상, 다침, 병, 억류, 포로, 실종으로 잃은 군인이고 한 병사가 여러 번 셀 수 있다. 사망자는 따로 추정한 숫자로 자료에 따라 다르다. American Battlefield Trust는 약 62만으로 보고, 85만까지 보는 추정도 있으나 이 단체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상자는 사망자와 다릅니다. 국립공원청이 적은 숫자를 항목별로 나눈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여기서 "사상자(casualty)"라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상자는 죽음만이 아니라 부상, 다침, 병, 억류, 포로, 실종으로 잃은 군인을 모두 셉니다. 한 병사가 전쟁 동안 여러 번 사상자로 적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상자 수는 죽은 사람의 수가 아닙니다.

죽은 사람의 수는 따로 추정하고,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American Battlefield Trust는 당시 인구의 약 2%, 약 62만 명이 복무 중 목숨을 잃었다고 봅니다. 85만 명까지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함께 적지만, 이 단체는 그 숫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상자는 약 150만으로 잡습니다.

사상자와 사망의 대부분은 전투와 관계없는 병 때문이었습니다. 전투에서 셋이 죽을 때 병으로 다섯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남북전쟁의 사상자가 많았던 배경"을 묻는다면 총보다 먼저 병을 보아야 합니다. 총이 남긴 몫을 따지는 일은 그다음입니다. 하나 더, 피해가 가장 컸던 게티즈버그의 사상자는 51,116명이었고, 하루 싸움으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앤티텀은 22,726명이었습니다.

논쟁: 소총이 전투를 바꾸었나

오래된 설명은 이렇습니다. 강선 소총이 사거리를 크게 늘렸는데, 군대는 여전히 활강총 시대처럼 어깨를 맞대고 줄을 서서 싸웠다는 것입니다. 포트 스콧의 자료는 이 발전이 군사 전술을 크게 바꾸었다고 쓰고, 소총의 유효 사거리를 400야드, 최대 사거리를 1,000야드로 적습니다. 그랜트 국립사적지의 역사 무기 해설사 숀 윌리엄스(Shawn Williams)도 인터뷰에서 미니에 탄을 전쟁 전 가장 중요한 무기 발전으로 꼽았고, 전쟁 중 상처의 75%가 미니에 탄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설명은 당대에도 있었습니다. 캔자스 대학 출판부의 책 소개는 당시 많은 사람이 새 무기의 사거리 500야드(활강 머스킷은 100야드)에 놀랐고, 소총이 전쟁을 길게 만든 큰 요인이라고 여겼다고 적습니다. 역사가들도 오랫동안 이 무기가 사상률을 크게 높이고, 결정적 승리를 드물게 하고, 기병과 포병의 몫을 줄였다고 가정해 왔습니다.

반론을 낸 사람은 링컨 메모리얼 대학교의 역사학 명예교수 얼 J. 헤스(Earl J. Hess)입니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그는 『The Rifle Musket in Civil War Combat: Reality and Myth』에서 소총의 영향이 생각보다 훨씬 작았고, 주로 산병전(skirmishing)과 저격 같은 주변 작전에 머물렀다고 봅니다. 전열끼리의 싸움을 바꿀 잠재력은 부족한 훈련, 가까운 거리에서 쏘기를 좋아한 병사들, 멀리 있는 적이 잘 보이지 않는 문제 때문에 거의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헤스가 드는 근거 가운데 하나는 탄이 그리는 길입니다. 새 머스킷의 탄은 포물선을 그렸기 때문에, 중간 거리에서는 적의 머리 위로 높이 지나갔다고 그는 봅니다. 그러면 가까운 곳과 먼 곳에 두 개의 살상 구역이 생기고, 그 사이에서는 맞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헤스는 이 주장을 병사들 자신의 관찰과 회고에 기대어 펼칩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이 글이 정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두 설명을 나란히 놓으면 숫자를 읽는 눈이 달라집니다. 앤티텀 숲의 둥근 탄과 게티즈버그의 겹겹이 장전된 총은, 종이 위의 사거리와 전장의 실제 사이에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작은 증거입니다.

자료별 사거리 비교 막대 도표, 단위는 야드. 활강 머스킷: 포트 스콧 국립사적지는 겨누어 맞히는 거리 80, 최대 250. 앤티텀 국립전적지는 .69 구경 둥근 탄의 유효 사거리 약 100. 국립공원청 해설사는 유효 사거리 75~100. 헤스 책 소개 쪽은 100. 강선 머스킷: 하퍼스페리 국립역사공원은 1848년 미니에 탄의 유효 사거리 200~250. 포트 스콧은 유효 400, 최대 1,000. 셰넌도어 해설의 M1861 표는 400~500. 해설사는 적어도 400. 헤스 책 소개 쪽은 500. 진한 막대는 짧은 쪽 숫자(겨눈 거리나 유효 사거리), 옅은 막대는 최대 사거리, 점은 한 값, 화살표는 '적어도'라는 메모와, 헤스 책 소개 쪽 숫자는 당대 사람들이 믿은 값이라는 메모가 있다
같은 총, 다른 숫자. 자료마다 적은 사거리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남긴 것: 후장식으로 가는 길

미니에 탄은 강선 머스킷을 양쪽 보병의 표준 무기로 만들었지만, 탄을 총구로 넣는 방식은 그대로였습니다. 전장식은 장전이 느리고 번거로웠습니다. 총의 뒤쪽을 열어 탄을 넣는 후장식(breechloader)은 빨랐지만, 약실 틈으로 가스가 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1850년대에 여러 발명가가 구리 탄약 같은 방법으로 이 문제를 상당 부분 풀었습니다. 그래도 육군은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라며 후장식을 꺼렸고, 후장식은 남북전쟁 후반에야 널리 쓰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1865년에는 전장식 총열의 뒤를 잘라 내고 "트랩도어(trapdoor)"라 불리는 뚜껑 장치를 단 개조 소총이 약 5,000정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M1865 올린(Allin) 개조 소총입니다.

구경은 .58 그대로였지만 종이 탄약포 대신 금속 탄약을 썼습니다. 이듬해의 M1866은 구경을 .50으로 줄였고 25,000정이 만들어졌습니다. 미니에 탄의 시대는 이렇게 금속 탄약의 시대로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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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함과 버지니아함: 철갑함끼리의 첫 대결: 같은 전쟁의 바다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기술 변화입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새 무기가 나올 때마다 전장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20세기 기술로 이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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