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5일 아침, 탈레반이 카불로 들어왔습니다. 20년 전 미국의 공습이 시작되고 한 달 남짓 만에 카불을 비우고 물러났던 바로 그 세력입니다. 보름 뒤인 8월 30일, 마지막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났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20년 전쟁은 시작한 자리로 돌아온 듯이 끝났을까요? 미 의회조사국(CRS) 보고서와 나토·유엔의 기록, 미 국방부와 호주 전쟁기념관, 한국 외교부 자료를 나란히 놓고 2001년부터 2021년까지를 단계별로 따라갑니다. 병력과 사상자 수는 자료마다 세는 기준이 달라서, 숫자마다 어느 기관의 것인지 함께 적습니다.

9·11 이전: 소련군 철수에서 탈레반까지

1979년 12월 말, 소련은 수천 명의 군대를 아프가니스탄에 보냈습니다. 10년의 소모적인 반란 끝에 소련군은 물러났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그 대가를 수백만 명의 목숨과 수십억 달러로 적습니다.

소련군이 떠나자 미국의 관심도 줄었습니다. 카불의 미국 대사관은 1989년 1월 안전 문제로 비워졌고 2001년까지 닫혀 있었습니다. 1992년 소련이 지원하던 정부가 무너진 뒤에는 무자헤딘(반소 저항 세력) 사이의 내전이 4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 혼란 속인 1993~1994년, 대부분 시골의 파슈툰 출신인 성직자와 학생들이 탈레반 운동을 만들었습니다. 탈레반이라는 이름은 이슬람을 배우는 학생을 뜻하는 talib의 복수형입니다. 이들은 1994년 11월 남부 도시 칸다하르를 차지했고, 1996년 9월 27일 카불을 점령했습니다.

탈레반은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을 다스렸습니다. 보건 분야를 빼고는 여성이 학교에 다니거나 집 밖에서 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2001년 3월에는 바미안의 6세기 대불상을 부숴 국제적 비난을 받았습니다.

같은 1996년, 오사마 빈 라덴이 수단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 왔습니다. 탈레반은 빈 라덴의 조직 알카에다에게 신병과 훈련소를 둘 곳을 내주었습니다. 1998년 8월 7일 알카에다 요원들이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을 동시에 폭파해 200명 넘게 숨졌고, 1999년 10월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267로 탈레반 제재가 더해졌습니다.

2001년 가을: 몇 주 만에 카불을 비운 탈레반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 요원들이 미국에서 일으킨 연쇄 테러로 3,000명 가까이 숨졌습니다. 이튿날 유엔 안보리는 결의 1368을 채택했습니다. 결의는 헌장에 따른 개별적·집단적 자위권을 확인하고, 이 공격을 국제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습니다.

같은 날 나토 동맹국들은 공격이 외부에서 지시된 것으로 확인되면 집단 방위 조항인 워싱턴 조약 5조를 발동하기로 했습니다. 나토 역사에서 처음이었습니다. 10월 2일 북대서양이사회는 9·11이 5조에 해당하는 공격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탈레반에게 알카에다 지도부를 넘기라고 요구했습니다. 탈레반 지도부는 빈 라덴이 자기들의 손님이라며 거절했습니다. 미 의회는 9월 18일 무력 사용 승인법(AUMF)을 만들었습니다.

10월 7일 미군의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전국의 탈레반 목표를 노린 공습과, 북부에서 탈레반과 싸우던 아프간 세력을 돕는 근접 항공 지원이었습니다. 2주가 안 되어 소수의 미 육군 특수부대와 중앙정보국(CIA) 준군사 요원, 일부 일반 지상군이 들어갔습니다.

11월 13일까지 탈레반은 카불을 비웠고, 북부동맹이라 불리던 아프간 세력이 곧 카불을 되찾았습니다. 미국이 지원한 아프간 세력은 탈레반 운동이 태어난 남부 칸다하르로 다가갔습니다. 많은 탈레반 전투원과 지도자가 죽거나 붙잡혔지만, 지도자 물라 오마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외딴 시골로 숨거나 파키스탄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미국 혼자 간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호주는 앤저스(ANZUS) 조약을 발동해 2001년 10월 11일 군사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호주 공군 제33비행대대의 보잉 707 공중급유(aerial refueling) 항공기 2대도 키르기스스탄 마나스 기지에서 활동했습니다.

연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1979년 12월 말 소련군 진입, 1989년 소련군 철수, 1996년 9월 27일 탈레반 카불 점령, 2001년 9월 11일 테러, 10월 7일 미군 공습 시작, 11월 13일까지 탈레반 카불 철수, 12월 본 협정과 결의 1386(ISAF 승인), 2003년 8월 나토가 ISAF 지휘, 2009년 12월 3만 명 증파 결정, 2011년 5월 1일 빈 라덴 사망, 2014년 12월 28일 ISAF 종료, 2015년 1월 1일 확고한 지원 임무(RSM) 시작, 2020년 2월 29일 미국-탈레반 합의, 2021년 8월 15일 탈레반 카불 진입, 8월 30일 미군 철수 끝. 시기는 세 구간(공습과 재건, 증파, 이양과 철수)으로 색을 나눴다
1979~202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진 일과 20년의 주요 날짜 (도표)(도표)

본 협정과 ISAF: 카불에서 전국으로

2001년 12월, 유엔이 독일 본에 불러 모은 아프간 대표들은 하미드 카르자이를 임시 정부의 수반으로 뽑았습니다. 탈레반을 이 회담에 넣으려는 시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카르자이는 2002년 긴급 로야 지르가에서 대통령으로 뽑혔는데, 로야 지르가는 아프가니스탄의 전통 협의 회의입니다.

안보리는 12월 20일 결의 1386으로 국제안보지원군(ISAF)을 승인했습니다. 유엔 헌장 7장에 따른 결정이었고, 6개월 동안 카불과 그 주변의 치안을 지켜 아프간 임시 행정부를 돕는 것이 처음 임무였습니다. 2002년 1월 첫 부대가 도착했을 때 지휘는 영국이 맡았고 다른 18개국이 병력과 장비를 보냈습니다.

미국은 2003년 5월 1일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전투 작전이 끝났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만 럼즈펠드 국방장관도 일부 지역에 저항 거점이 남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해 8월 11일 나토가 ISAF 지휘를 맡으면서 6개월마다 지휘국이 바뀌던 방식이 끝났고, 10월에는 유엔이 ISAF의 임무 지역을 아프가니스탄 전역으로 넓혔습니다.

ISAF는 한 번에 나라 전체로 퍼지지 않았습니다. 2003년 말 북부 쿤두즈의 독일 주도 지방재건팀(PRT)을 넘겨받은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때 다른 8개 PRT는 미국이 이끄는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의 지휘 아래 남아 있었습니다.

북부와 서부까지 넓힌 뒤 ISAF는 9개 PRT로 국토의 50%에서 치안 지원을 했습니다. 2006년 남부로 넓혀서는 13개 PRT로 약 4분의 3을 맡았고, 병력은 약 1만 명에서 약 2만 명으로 늘었습니다. 2006년 하반기에는 임무 지역이 나라 전체가 되었습니다.

단계 도표. 국제안보지원군(ISAF)의 임무 지역이 넓어진 순서를 상자 다섯 개로 그렸다. 1단계 2002년: 카불과 그 주변, 첫 6개월 지휘는 영국, 다른 18개국 참여. 2단계 2003년 말~2004년: 북부, 쿤두즈 지방재건팀(PRT)부터. 3단계 2005~2006년: 서부까지, 9개 PRT, 국토의 50%. 4단계 2006년: 남부까지, 13개 PRT, 약 4분의 3, 병력 약 1만에서 약 2만으로. 5단계 2006년 하반기: 전국. 지도가 아니며 위치와 경계는 그리지 않았다는 메모가 있다
ISAF가 카불에서 전국으로 넓어진 다섯 단계. 지도가 아니라 순서만 나타냅니다 (도표)(도표)

돌아온 반군과 증파

그사이 탈레반은 다시 모였습니다. 호주 전쟁기념관의 정리로는 2002년 중반 미국이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로 눈을 돌리면서 전쟁이 결론 없이 멈췄습니다. 남부와 파키스탄으로 옮긴 탈레반 지도부는 2003년까지 조직을 다시 갖춰 카불 정부에 맞선 반란을 벌였습니다.

CRS 보고서는 시점을 조금 늦게 잡습니다. 2005년 무렵 흩어진 탈레반이 동부·남부의 파슈툰 지역과 국경 너머 파키스탄에서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2007년까지 탈레반은 넓은 지역을 되찾았습니다.

동부와 남부로 들어간 ISAF 부대는 2007년과 2008년 커지는 반란과의 싸움에 점점 더 휘말렸습니다. 미국은 부시 정부 말까지 병력을 약 3만 명으로 늘렸습니다. 2009년 2월 오바마 대통령은 1만 7,000명을 더 보낸다고 발표했습니다.

12월에는 석 달 동안 군사 작전을 검토한 끝에 3만 명을 더 보내기로 했습니다. 동시에 2011년 여름부터 미군을 줄이기 시작하겠다고 약속했고, 나토 외무장관들도 7,000명을 더 보내기로 했습니다. 나토는 그해 새 대반란 작전과 함께 4만 명이 더 배치됐다고 정리합니다.

이 증파로 국제 병력은 2010~2011년 13만 명을 넘어 정점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미군이 약 10만 명이었습니다. 증파가 탈레반의 진격을 약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는 2010년까지 군사 수단만으로는 분쟁이 풀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2014년 말까지 전투 작전을 끝낸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2011년 5월 1일, 빈 라덴이 파키스탄에서 미 특수작전부대에 사살됐습니다. 호주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나토 지도자들은 이 일 뒤 아프가니스탄을 떠날 출구 전략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점 도표. 자료에 적힌 시점의 병력만 점으로 찍었고 점 사이를 잇지 않았다. 미군(진한 점): 2009년 1월 무렵 약 3만, 2010~2011년 약 10만, 2017년 1월 약 1만 1,000, 2017년 말 1만 4,000~1만 5,000, 2019년 10월 1만 2,000~1만 3,000, 2020년 6월 무렵 8,600, 2021년 1월 2,500. 국제 병력 전체(빈 점): 2006년 ISAF 약 1만에서 약 2만, 2010~2011년 13만 명 넘게, 2020년 8월 RSM 약 1만. 출처는 미 의회조사국 R46879와 나토라는 메모가 있다
자료에 적힌 시점별 병력. 점 사이의 변화는 그리지 않았습니다 (도표)(도표)

넘겨주기: 2011~2014년의 전환

넘겨주기는 2011년에 시작됐습니다. 다리어와 파슈토어로 '인테칼(Inteqal)'이라고 부른 이 과정은 치안 책임을 아프간에 차츰 넘기는 일이었습니다. 2011년부터 ISAF는 아프간군의 능력을 키우는 것을 임무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이양은 2014년 12월 예정대로 끝났습니다. 12월 28일 카불에서 열린 의식으로 ISAF는 임무를 공식적으로 마쳤고, 아프간군이 나라 전체의 치안을 맡았습니다.

2015년 1월 1일부터는 아프간 국가방위보안군(ANDSF)을 훈련하고 자문하고 지원하는 '확고한 지원 임무(Resolute Support Mission, RSM)'가 이어졌습니다. 2020년 8월 RSM에는 36개 동맹·협력국에서 온 약 1만 명이 있었습니다. 미군은 RSM 임무와 함께 대테러 작전도 했고, 두 임무를 묶어 '자유의 파수꾼 작전(Operation Freedom's Sentinel)'이라고 불렀습니다.

2020년 합의와 2021년 8월

2017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아프가니스탄의 미군은 약 1만 1,000명으로 알려졌습니다. 추가 병력이 들어가 2017년 말에는 1만 4,000~1만 5,000명이 됐습니다. 2018년 중반 트럼프 대통령은 아프간 정부를 빼고 탈레반과 공식·직접 협상을 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런 협상은 처음이었습니다.

2019년 10월 현지 미군 사령관은 지난 1년 동안 병력이 2,000명 줄어 1만 2,000~1만 3,000명이 됐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2020년 2월 29일, 미국과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를 가져오는 합의'에 서명했습니다.

합의문에서 미국은 발표 뒤 14개월 안에 미군과 동맹·연합군은 물론 비외교 민간 인력과 민간 경비업체까지 모두 빼기로 했습니다. 처음 135일 안에는 미군을 8,600명으로 줄이기로 했습니다. 그 대가로 탈레반은 알카에다를 비롯한 어떤 집단도 미국과 동맹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철수 약속은 탈레반이 아프간 정부에 대한 폭력을 줄이는 것을 조건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프간 정부는 합의의 당사자도 아니었습니다. 합의문은 아프간 내부 협상을 2020년 3월 10일 시작한다고 적었지만, 실제 협상은 9월 12일에야 도하에서 열렸습니다.

미군은 합의의 7월 중순 기한보다 한 달 먼저 8,600명이 됐고, 2021년 1월 15일에는 2,500명이 됐습니다. 4월 14일 바이든 대통령은 5월 1일 '마지막 철수'를 시작해 9월 11일까지 끝내겠다고 발표했고, 같은 날 나토 동맹국도 5월 1일까지 RSM 철수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7월 8일 바이든 대통령은 군사 임무가 8월 31일 끝난다고 밝혔습니다.

탈레반의 진격은 5월 초 시작됐습니다. 먼저 시골의 넓은 지역이 넘어갔고, 한 자료는 5~6월에 400개 군(district) 가운데 100개 넘게 탈레반이 장악했다고 추정했습니다. 7월 21일 밀리 합참의장은 200개가 넘는 군이 탈레반 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8월 6일 탈레반은 처음으로 주도(州都)를 점령했습니다. 그 뒤 한 주 만에 주도의 절반이 넘어가자 많은 관찰자가 놀랐습니다. 8월 15일 아침 탈레반은 카불로 들어갔고, 그날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나라를 떠났습니다.

8월 26일 카불 공항에서 이슬람국가(IS)의 공격으로 미군 13명과 아프간인 100명 넘게 숨지고 미군 18명이 다쳤습니다. 연합의 카불 공항 공수로 12만 명이 넘는 사람이 빠져나갔고, 그 가운데에는 나토에서 일한 아프간인과 가족 약 2,000명이 있었습니다. 미군의 철수와 대피 작전은 8월 30일 끝났습니다.

무기와 조직: 무엇에 기대어 싸웠나

이 전쟁의 첫 장면은 대군의 진격이 아니었습니다. 2001년 가을 미국은 하늘에서는 공습과 근접 항공 지원을, 땅에서는 소수의 특수부대와 CIA 요원, 그리고 북부동맹 같은 아프간 세력을 앞세웠습니다. 카불을 되찾은 것도 아프간 세력이었습니다.

그 뒤 20년 동안 무게는 아프간군을 키우는 쪽으로 옮겨 갔습니다. 2002년 창설된 아프간 국군(ANA)은 보병 중심 군대에서 헌병, 정보, 도로 개척, 전투 지원, 의무, 항공, 군수 같은 지원 능력을 갖춘 군대로 차츰 바뀌었습니다. 아프간 공군도 고정익·회전익 항공기를 늘렸습니다.

2021년에는 이렇게 키운 군대가 무엇에 기대고 있었는지가 물음이 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이 내놓은 설명 가운데 하나는 아프간군이 자기 공군의 정비와 정보, 근접 항공 지원을 미국·국제 계약업체에 기댔는데 이들이 합의에 따라 떠났다는 것입니다. ANDSF의 공식 병력은 30만에 조금 못 미쳤지만, 대부분의 관찰자는 실제 병력이 그보다 적었다고 봅니다.

민간인을 해친 무기 가운데에는 급조폭발물(IED)이 있었습니다. 유엔 아프가니스탄 지원단(UNAMA)은 평화 협상이 시작된 뒤인 2020년 4분기의 민간인 사상자가 2019년 같은 석 달보다 45% 늘었고, 특히 급조폭발물과 표적 살해가 그 원인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급조폭발물과 이를 견디도록 만든 차량은 따로 다룰 주제입니다.

한국군의 아프가니스탄 파견

한국도 이 전쟁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외교부 기록에서 첫 병력 파견은 2002년 2월이었습니다. 의료를 맡은 동의부대와 공병을 맡은 다산부대는 바그람에 본부를, 키르기스스탄 마나스에 파견대를 두었습니다.

두 부대는 14개국 군에 의료와 공병 지원을 하면서 전쟁 난민과 지역 주민 구호도 했습니다. 2003년 8월 27일 교대하러 떠난 병력은 동의부대 77명, 다산부대 138명으로 모두 215명이었습니다. 이 첫 파견은 2007년 12월 철수로 끝났고, 그때 인원은 220여 명이었습니다.

2008년 6월에는 바그람 미군 기지 안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재건사업이 시작됐습니다. 2009년 12월 8일 국무회의는 파르완주에 350명 이내의 국군을 보내는 동의안을 의결했습니다. 이 부대의 주요 임무는 지방재건팀(PRT) 보호였고, 파견 기간은 2010년 7월 1일부터 2012년 12월 31일까지로 잡혔습니다.

한국 지방재건팀은 2010년 7월 파르완주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외교부 공무원, 오쉬노부대(Ashena Unit), 경찰, 한국국제협력단(KOICA), 병원과 직업훈련원 인력이 함께 꾸린 팀이었고, 4년 동안 모두 약 2,500명이 참여했습니다. 2012년 12월에는 차리카 기지를 아프간 정부에 넘겼습니다.

한국 PRT는 2014년 6월 23일 종료식으로 4년 임무를 공식적으로 마쳤습니다. 외교부는 이 철수를 ISAF 임무가 끝나면서 각국 PRT가 모두 철수하는 흐름의 일부로 설명했습니다.

20년이 남긴 것

미 국방부 집계로 2001년 10월 7일부터 2014년 말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숨진 미군은 2,219명, 전투 중 다친 미군은 20,093명입니다. 2015년 이후 자유의 파수꾼 작전에서 109명이 더 숨지고 620명이 다쳤습니다. 두 기간을 합친 미군 사망자는 2,328명입니다.

연합군 사망자의 3분의 1 가까이는 미국 밖의 나토 회원국과 협력국에서 나왔습니다. 2011년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13만 명 가운데 약 4만 명이 이들 나라의 병력이었습니다. ISAF의 참가국 수는 나토의 두 쪽에 50개국과 51개국으로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UNAMA는 2009년부터 민간인 피해를 체계적으로 기록해 왔습니다. 2020년은 한 해 민간인 사망자가 3,000명을 넘은 해가 7년째 이어진 해였습니다. 그해 민간인 사상자는 8,820명으로, 3,035명이 숨지고 5,785명이 다쳤습니다.

돈으로 본 비용도 셈법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미 국방부는 2001년 9월부터 2021년 3월까지 아프가니스탄의 군사 작전과 재건에 명목 금액으로 8,373억 달러를 집행했고, 한 해 집행액은 2012 회계연도의 980억 달러가 가장 많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재건 특별감사관(SIGAR)이 집계한 재건 관련 예산은 약 1,450억 달러였습니다. 브라운대 Costs of War 프로젝트는 빌린 돈의 이자와 참전 군인 의료비까지 넣어 2.26조 달러로 추정했습니다.

정부군이 왜 그렇게 빨리 무너졌는지에는 한 가지 답이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높은 사상·이탈률, 병사들이 급여와 식량을 받지 못할 만큼 퍼진 부패, 미국이 끝내 떠나리라고 믿지 않은 지도부의 준비 부족을 듭니다. 시골 거점을 내주지 않으려다 병력이 지나치게 흩어졌다는 설명, 2020년 합의 뒤 탈레반의 돈을 받고 항복하는 병사가 늘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미국이 만든 중앙집중형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의 사정에 맞지 않았다는 주장, 미국이 질보다 병력 수를 앞세웠다는 지적도 함께 나옵니다. CRS 보고서는 이 설명들을 어느 하나로 줄이지 않고 나란히 듭니다.

철수 결정을 두고도 견해가 갈립니다. 몇천 명의 작은 병력을 남겨 아프간 내부 평화 합의를 도울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그런 병력으로는 탈레반을 억제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병력을 늘려야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최소 병력이 가능했더라도 더 많은 자원과 목숨을 걸 가치는 없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나토는 지난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비롯된 동맹국 땅의 테러 공격은 없었다고 적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체 평가에서는 짧은 예고로 대규모 대피를 해낼 능력을 키울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권했습니다. 탈레반이 돌아온 뒤 여자아이들은 중등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고, 난민이 대거 빠져나가며 인도주의 위기가 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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