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9년 5월 8일, 오를레앙을 일곱 달 가까이 에워쌌던 잉글랜드군이 진지를 거두고 물러났습니다. 오를레앙 사람들은 그날을 지금도 기념합니다. 해마다 5월 8일이면 도시가 잔 다르크를 기리고, 시는 그 축제의 역사를 597년으로 셉니다.
열흘쯤 전에 도시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동레미라는 마을에서 온 젊은 여성, 잔 다르크(Jeanne d'Arc)입니다. 영국 왕립무기고 박물관(Royal Armouries)은 오를레앙 포위전을 백년전쟁의 전환점으로 꼽습니다.
포위는 왜 시작됐고, 일곱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잔 다르크는 어떻게 그 자리에 섰고, 해제 뒤에는 어떻게 됐을까요. 박물관과 도서관 자료, 그리고 1431년 재판 기록에 남은 본인의 대답으로 따라가 봅니다.
왕이 둘이던 프랑스
1422년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같은 해에 죽었습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BnF)의 해설에 따르면, 열 달 된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왕국의 유일한 군주가 됐습니다. 그런데 부르주로 피해 있던 왕세자도 샤를 7세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왕이 됐습니다. 프랑스에 왕이 둘이 된 것입니다.
전쟁은 1423년에 다시 붙었습니다. 샤를 쪽 군대는 크라방(1423)과 베르뇌유(1424)에서 졌고, 프랑스 섭정을 맡은 베드퍼드 공에게 루아르강 남쪽으로 밀려났습니다. 이긴 잉글랜드는 1428년 오를레앙을 포위합니다.
도시를 둘러싼 일곱 달
잉글랜드군은 1428년 10월 12일부터 방비가 튼튼한 오를레앙을 에워쌌습니다. 시작부터 큰일이 터졌습니다.
10월 24일 잉글랜드군 지휘관 솔즈베리 백작이 막 차지한 투렐(Tourelles) 요새에서 도시를 살피던 중이었습니다. 날아온 포탄이 나무 턱을 때렸고, 튄 나무 조각이 그의 얼굴에 박혔습니다. 그는 여드레 뒤 죽었습니다.
중세 군사사 학술지(Journal of Medieval Military History)에 실린 댄 스펜서(Dan Spencer)의 글은 잉글랜드 최고 지휘관을 잃은 이 일을 포위의 결말에 결정적인 사건으로 봅니다.
그래도 포위는 이어졌고, 수비대는 몇 달을 버텼습니다. 1429년 2월,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보급 행렬을 끊으려 했다가 오히려 졌습니다. "청어 전투(Battle of the Herrings)"라는 이름이 붙은 싸움입니다. 이 무렵에는 잉글랜드가 우세해 보였습니다.
동레미에서 온 사람
잔 다르크 자신의 말이 가장 길게 남은 곳은 그를 단죄한 재판정의 기록입니다. 1431년 루앙 재판 기록(W. P. Barrett 영역)을 보면, 그는 고향에서 자네트(Jeannette)라 불렸고 프랑스에 와서 잔이라 불렸다고 답했습니다. 태어난 곳은 그레(Greux)와 한 마을인 동레미(Domrémy), 아버지는 자크 다르크, 어머니는 이자벨이었습니다.
열세 살 때 처음 신에게서 온 목소리를 들었고, 처음에는 몹시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그 목소리가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어야 한다고, 보쿨뢰르(Vaucouleurs) 수비대장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에게 가라고 말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자신은 말 타기도 싸움도 모르는 가난한 처녀라고 대답했다는 말도 기록에 있습니다.
보드리쿠르는 두 번 그를 돌려보냈고, 세 번째에 호위를 붙였습니다. 잔은 남자 옷을 입고, 보드리쿠르가 준 칼 한 자루만 든 채 기사 한 명, 종자 한 명, 하인 넷과 길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1920년 교황청이 낸 시성 칙서에는 왕세자 샤를이 잔이 밝힌 비밀 때문에 그를 크게 믿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도 왕세자는 이 일을 중대하게 보고 성직자들의 판단을 구했습니다.
칙서에 따르면 왕은 그를 푸아티에로 보내 대학 박사들에게 검토받게 했고 3주 뒤 신앙에 어긋나는 것을 찾지 못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고 적혀 있습니다. 잔은 왕위를 되찾고 잉글랜드를 몰아낼 신성한 사명을 받았다며 왕세자를 설득했습니다.
1429년 3월 22일, 오를레앙에 닿기 전에 잔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포드햄 대학의 원사료 모음(Internet Medieval Sourcebook)에 실린 이 편지는 오를레앙 앞에 있는 궁수와 병사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입니다. 재판에서 그는 이 편지를 보낸 것은 맞지만, 재판정이 읽어 준 사본에는 원래 편지에 없던 말이 두세 군데 있다고 따졌습니다.
4월 29일부터 5월 8일까지
1429년 4월 29일, 잔은 중무장병 약 200명과 오를레앙에 들어갔습니다. 그해 봄 그는 도시 서쪽, 오를레앙 공의 회계관 자크 부셰(Jacques Boucher)의 집에서 열흘을 지냈습니다. 이 집은 1940년 불에 무너졌고, 다시 지어 1965년에 문을 연 뒤 1975년부터 잔 다르크 박물관으로 쓰입니다.
5월 6일과 7일, 잔은 잉글랜드 진지 공격을 이끌었고 공격은 성공했습니다. 재판에서 그는 먼저 생루(Saint-Loup) 요새로, 다음에 다리 요새로 갔다고 답했습니다. 다리 요새를 칠 때 목에 화살인지 석궁 살인지를 맞았지만 보름 만에 나았다고 했습니다.
5월 8일 잉글랜드는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습니다.
잔은 싸움터에서 무엇을 들었을까요? 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는 칼보다 깃발이 훨씬 좋았고, 아무도 죽이지 않으려고 공격할 때 깃발을 직접 들었으며,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 깃발은 흰 천에 백합을 흩뿌린 바탕이었다고 했습니다.
포위전의 무기: 요새, 대포, 화살
포위전은 백년전쟁의 큰 부분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가장 흔한 공성 무기는 평형추의 무게로 돌을 던지는 트레뷰셋(trebuchet)이었고, 나무로 만든 공성 무기는 차츰 봄바드(bombard) 같은 대포에 자리를 내줬습니다. 포위전이 중요해질수록 프랑스 도시들은 방비를 더 굳혔고, 수비하는 쪽은 벽의 화살 구멍과 성가퀴에서 활을 쏘았습니다.
솔즈베리 백작을 쓰러뜨린 것은 포탄이었습니다. 1428년 무렵에는 포병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5세기 초 잉글랜드 군대의 화약 무기를 보여 주는 증거는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왕실 무기고였던 런던탑의 기록이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428년 원정은 예외입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의 재무부 문서(E101/51/27, E101/51/30)에 포병 회계가 남아 있고, 15세기 잉글랜드 원정군의 포병 회계로는 가장 이른 것입니다. 이 기록은 화약 무기를 마련하는 데 큰 자원이 들었고 그 쓸모가 인정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화살과 석궁도 여전했습니다. 재판정은 잔에게, 공격을 앞두고 자신이 화살과 석궁 살, 투석기나 대포가 던진 돌을 맞을 것이라고 병사들에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잔은 아니라고 답하면서, 부상자가 백 명이 넘었다고 했습니다. 이 물음 하나에 그 시대 포위전의 무기가 여럿 들어 있습니다.
무기가 전쟁을 바꾼 다른 시대의 순간은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에서 이어집니다.
숫자는 자료마다 다르다
병력부터 자료마다 다릅니다. Royal Armouries는 잔이 중무장병 약 200명과 입성했다고 적습니다. 재판에서 잔은 왕이 1만 또는 1만 2천 명을 줬다고 답했습니다. 교황청 문서는 블루아에 오를레앙으로 보낼 보급을 마련한 약 1만 2천 명의 군대가 모여 있었다고 씁니다.
세 숫자는 하나를 두고 다툰 값이 아닙니다. 함께 성문을 들어선 무리, 그에게 맡겨진 병력, 집결지에 모인 군대를 각각 센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하나를 골라 "잔 다르크의 군대는 몇 명"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나이도 그렇습니다. BnF의 해설은 잔을 "열다섯 살쯤"의 젊은 신비가로 소개합니다. 1431년 재판에서 본인은 열아홉 살쯤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고, Royal Armouries는 죽을 때 겨우 열아홉 살이었다고 적습니다.
오를레앙 다음: 랭스, 루앙, 그리고 복권
잉글랜드는 6월 18일 파테(Patay)에서도 졌습니다. 많은 곳이 잔에게 항복했고, 왕세자는 전통적인 대관 장소인 랭스에 들어가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로 대관했습니다. BnF는 오를레앙의 승리가 여러 해 전쟁으로 사기가 꺾인 왕세자 군대에 자신감을 되돌려 주었고, 샤를 7세의 정통성을 세운 승리들이 잉글랜드의 힘을 크게 흔들었다고 평가합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1429년 9월 8일, 대관에서 돌아오던 왕의 군대가 아직 잉글랜드 쪽이던 파리 앞을 지났고, 잔의 공격은 실패했습니다. 1430년 그는 부르고뉴파에 사로잡혀 잉글랜드에 팔렸습니다. 교황청 문서는 그 무렵 그가 콩피에뉴(Compiègne)를 지키고 있었다고 적습니다.
잉글랜드는 그를 교회에 넘겨 이단으로 재판하게 했습니다. 루앙의 재판정은 그를 단죄했고, 처음에는 판결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돌아섰다는 이유로 세속 권력에 넘겼습니다. 그는 1431년 5월 루앙에서 화형됐습니다. BnF는 화형 선고일을 5월 30일로 적습니다.
이 판결은 뒤에 뒤집혔습니다. 1456년 루앙이 다시 프랑스 손에 들어온 뒤 다시 재판이 열렸고, 1431년의 판결은 무효가 됐습니다. 교황청 문서에 따르면 고향과 오를레앙, 파리, 루앙에서 123명의 증인을 신문했고, 복권 판결은 1456년 7월 7일에 나왔습니다. 1920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그를 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오를레앙의 5월 8일은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시민과 군과 종교의 전통이 섞인 이 축제는 2018년부터 프랑스 무형 문화유산 목록에 올라 있습니다. 잔 다르크는 헨리 5세,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오늘날까지 이름이 널리 남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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