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장강 위로 불붙은 배 몇 척이 바람을 타고 건너편 기슭으로 흘러갑니다. 소설이나 게임으로 『삼국지』를 만난 사람이라면 이 장면과 함께 제갈량이 술법으로 동남풍을 부르는 모습,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놓아주는 모습까지 한꺼번에 떠올릴 것입니다.

그 가운데 어디까지가 기록에 있을까요? 208년 적벽 전투는 중국사에서 가장 이름난 싸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덧붙은 이야기가 워낙 많아서, 이 시대 오나라의 역사를 책으로 쓴 레이프 드 크레스피니(Rafe de Crespigny)는 싸움이 있기는 했는지 묻고 싶어질 정도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따져 본 끝에 그때 그곳에서 군사 행동이 있기는 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 글은 정사 『삼국지』와 그 주석이 전하는 전투의 흐름을 먼저 따라갑니다. 그다음 그 시대의 배와 불을 보고, 마지막으로 소설 『삼국지연의』가 무엇을 바꾸고 더했는지를 기록과 나란히 놓아 봅니다.

208년, 조조가 남쪽으로 내려오다

208년 가을, 형주를 다스리던 유표가 죽었습니다. 뒤를 이은 아들 유종에게 조조의 군대가 다가오자 측근들은 항복을 권했습니다. 유종에게는 사실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형주에는 유표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유비가 있었습니다. 유비는 남쪽 장강 가의 강릉으로 가려 했습니다. 강릉은 남군의 중심으로, 중요한 군사 기지이자 보급 창고였습니다. 조조도 강릉의 값어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조조군은 당양 근처 장판에서 유비의 무리를 따라잡아 크게 이겼고, 유비는 따르던 사람들과 가족까지 버려 둔 채 달아나야 했습니다.

유비는 관우가 이끌던 한수의 선단과 합쳐 한수와 장강이 만나는 하구로 물러났습니다. 그 뒤 손권이 보낸 노숙의 권유로 더 동쪽 번구에 새 본영을 두었습니다. 장강 쪽의 더 큰 함대가 머물던 강릉은 이제 조조의 손에 있었습니다.

가로 연표. 208년 가을 유표가 죽음. 208년 유종이 항복하고 유비가 장판에서 짐. 음력 10월(208년 11월 말이나 12월 초) 주유와 정보가 출병. 208년 겨울(아마 208년 말쯤) 적벽 전투. 209년 주유가 강릉을 차지. 210년 주유가 죽음. 아래 상자에 중국 기록은 날짜를 건안 13년 겨울로 적고, 적벽의 대치가 얼마나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는 메모가 있다
적벽 원정의 흐름. 날짜는 드 크레스피니의 『Generals of the South』를 따랐고, 점 사이 간격은 실제 비율이 아닙니다 (도표)(도표)

손권의 조정은 왜 싸우기로 했나

장강 하류를 차지한 손권은 정해야 했습니다. 항복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이 논쟁은 기록부터 둘로 갈립니다. 오나라 쪽 주유전은 항복론에 맞선 단 한 사람의 신하로 주유를 그립니다. 제갈량전에서는 망설이는 손권을 제갈량이 말솜씨로 설득합니다.

두 대목은 모두 진수가 쓴 같은 역사책 안에 있습니다. 진수는 두 대목을 다 쓰면서도 두 전승의 모순을 그대로 남겼고, 뒤에 주석을 단 배송지가 이 점을 짚었습니다. 제갈량이 이름난 책사라서 거의 결정적인 역할을 받았고, 뒤 시대 저자들은 결말을 알고 썼습니다. 그래서 이 논쟁의 기록은 흐려져 있습니다.

큰 줄기는 이렇습니다. 노숙은 유비와 손잡고 형주에 나서자는 쪽이었고, 장소처럼 신중한 신하들은 본거지에서 먼 곳에 군대를 보내는 데 반대했습니다. 그때 조조의 편지가 왔습니다. 『강표전』이라는 책이 전하는 그 편지에는 "수군 80만을 거느리고 오에서 사냥을 하겠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주유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조조의 군대는 물 위 싸움에 서툴고, 다가오는 겨울에는 말 먹이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강표전』에는 그날 밤 주유가 손권을 따로 찾아가 숫자를 따진 대화도 실려 있습니다. 조조가 북쪽에서 데려온 병사는 15만~16만을 넘지 않고, 유표에게서 얻은 병사는 많아야 7만~8만에 충성도 믿기 어렵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주유는 좋은 병사 5만이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다만 이 밤 대화는 정식으로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숫자는 조조의 편지든 주유의 계산이든 각자의 말로 읽어야 합니다.

손권은 칼을 뽑아 앞의 책상을 내리치고, 항복을 더 말하는 신하는 이 책상처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5만은 당장 모으기 어렵지만 3만은 이미 골라 두었다는 것이 손권의 대답이었습니다. 그에게 이것은 모든 것을 건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앞에서 막지 못하면 군사 대부분을 물리고, 남은 예비 병력으로 협상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음력 10월, 서력으로 208년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주유와 정보가 군사와 배를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1만, 유기에게 1만의 병력이 있다고 했지만 드 크레스피니는 아마 부풀린 말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적벽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연합군은 번구에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적벽이라는 곳에서 조조군의 선봉과 마주쳤습니다. 적벽은 지금의 후베이성 자위(嘉魚) 가까이, 우한과 웨양 사이의 장강 가로 봅니다. 정확한 자리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습니다. 드 크레스피니는 북서쪽 기슭의 오림 일대를 전장으로 보고, 우한에는 두 강이 만나는 곳에서 싸웠다는 지역 전승도 남아 있습니다.

조조의 선단은 강릉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왔습니다. 육군의 상당수는 강릉에서 화용을 지나는 동쪽 길로 와서 적벽 근처에서 선단과 합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순한 강 그림. 위쪽에서 내려온 한수가 오른쪽의 하구에서 장강과 만난다. 왼쪽 강릉에서 장강이 남동쪽으로 내려갔다가 북동쪽으로 올라가 하구를 지나 번구에 이른다. 강과 한수 사이에 화용이 있다. 장강 북서쪽 기슭에 조조의 진영 오림, 맞은편 기슭에 연합군 진영 적벽. 번호 화살표 셋: 1 조조의 선단이 강릉에서 강을 따라 내려옴, 2 육군 상당수가 아마 화용을 지나 옴, 3 연합군이 번구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옴. 아래 상자에 전장의 정확한 자리는 논쟁 중이고 이 그림은 드 크레스피니를 따라 후베이 자위 가까운 오림 일대로 그렸다는 메모가 있다
적벽 원정의 강과 자리를 아주 단순하게 그린 그림입니다. 지도가 아니며 축척이 없습니다 (도표)(도표)

조조군의 형편은 좋지 않았습니다. 긴 원정으로 북쪽 병사들이 지쳤고 진중에는 병이 돌았습니다. 첫 싸움은 손권·유비 연합군의 승리였습니다.

그 뒤 조조는 북서쪽 기슭의 오림 근처에, 연합군은 맞은편 적벽 아래에 진을 쳤습니다. 이 대치가 얼마나 이어졌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대치를 깬 사람은 주유 아래의 장수 황개였습니다. 황개는 사람을 보내 조조에게 항복하겠다고 알렸습니다. 그러고는 전함 한 무리에 마른 갈대와 섶을 채우고 기름을 부은 뒤, 붉은 천막 천으로 덮고 깃발을 세웠습니다. 배마다 고물에는 작은 배를 매달아 두었습니다.

배들이 강 한가운데를 지날 때 황개가 불을 붙였고, 다른 배의 지휘관들도 뒤따랐습니다. 사람들은 작은 배로 옮겨 탔고, 빈 화선은 뒤에서 부는 바람을 타고 조조의 선단과 진영에 부딪쳤습니다. 이 화선 이야기는 황개 자신의 전기가 아니라 주유전에 실려 있습니다.

조조의 배들은 이물과 고물을 맞대고 정박해 있어서 불이 선단과 군 전체로 번졌다고 전합니다. 다만 부대끼리 떼어 놓는 조치가 어느 정도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주유는 곧바로 가볍게 무장한 부대로 밀고 들어갔고, 조조는 물러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조조가 배를 적에게 넘기지 않으려 스스로 불태웠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형주 출신 병사 상당수가 배와 무기를 가지고 편을 바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조조는 북쪽으로 돌아가면서도 강릉에 강한 수비대를, 그 북쪽 양양에 또 한 군대를 남겼습니다.

사상자는 셀 수 없습니다. 화용으로 가는 퇴각 길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참혹한 이야기가 전하지만, 전통이 말하는 만큼 큰 싸움과 살육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라고 드 크레스피니는 적었습니다. 숫자가 없다고 해서 그 겨울 강가에서 병들고 지친 채 쓰러진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강 위의 배와 불

황개의 배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솔직히 알려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오나라의 전쟁은 장강의 수전과 떼어 놓을 수 없지만, 그 시대 전투의 전술도 배와 무기도 기록이 아주 적습니다.

기록은 황개의 배를 '몽충 투함(mengchong doujian)'이라고 적었는데, 그 시대에 전함을 두루 이르던 말입니다. 당나라 학자 이전(李筌)의 설명에서 몽충은 불과 화살을 막으려 날소가죽을 씌운 배였고, 빠르게 움직이도록 가볍고 좁게 만들었습니다. 이 설명이 실린 책은 8세기 중엽에 엮였으니, 적벽보다 500년 넘게 뒤의 것입니다.

배의 수부터 판본마다 다릅니다. 『삼국지』는 황개의 배를 "수십 척"이라 했는데, 같은 대목을 옮긴 『자치통감』에는 한 글자가 빠져 열 척이 됩니다. 한 글자 차이로 화선 공격의 규모가 몇 배씩 달라지는 셈입니다.

불 자체는 그 시대 싸움에서 흔한 무기였습니다. 화선은 약한 쪽 수군이 강한 쪽에 맞설 때 자주 써 온 방법이기도 합니다. 나무로 만든 배, 잘 타는 막사와 천막, 그리고 철에 맞지 않게 불어온 바람 앞에서 조조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람은 어땠을까요? 장강 중류의 겨울에는 주로 북서풍이 불어, 대부분의 날은 조조 쪽에 유리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남풍이나 동풍이 아주 드물거나 뜻밖인 바람은 아닙니다. 이 바람 이야기는 여러 해 동안 자위 근처에 머문 푸단대학 저우전허 교수에게 드 크레스피니가 직접 들은 설명입니다.

불만으로 승부가 갈린 것도 아닙니다. 기록으로 보면 조조군 안의 질병이 패배에 꽤 큰 몫을 했습니다.

『강표전』은 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편지도 전합니다. "적벽에서는 병 때문에 내가 배를 태우고 물러났을 뿐인데, 주유가 그 공을 제 것으로 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강표전』 스스로도 이 편지가 주유를 허풍쟁이로 깎으려는 말일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옛 학자 왕부지(王夫之)는 조조와 주유의 처지를 견주었습니다. 8년 전 관도에서 조조는 지키면서 원소의 군대를 지치게 해 이겼는데, 적벽에서는 처지가 거꾸로 되어 조조의 군대가 주유의 버티기에 눌렸다는 것입니다. 이 논의를 따르면 화선은 시간이 갈수록 커지던 무너짐을 앞당긴 계기였습니다.

기록은 무엇을 말하고 소설은 무엇을 더했나

먼저 기록이 어떤 책인지부터 봅니다. 정사 『삼국지』는 3세기의 진수가 쓴 본문과 5세기 초 배송지가 단 주석으로 이루어집니다. 배송지는 428년 황제의 명을 받아 주석을 지었고, 끌어온 자료마다 책과 저자를 밝혔습니다.

앞에 나온 『강표전』은 280년 진나라가 오를 정복한 직후 모은 지역 자료로, 배송지의 주석 속에 남았습니다. 이런 자료에는 대부분 허구인 일화도 많이 섞여 있습니다. 주석이 밝힌 출처가 곧 그 말이 사실이라는 보증은 아닌 셈입니다.

적벽 전투의 기록은 주로 주유전과 그 주석에 있습니다. 위나라 쪽 기록에는 아주 짧게, 촉 쪽에도 조금 더 나올 뿐입니다. 공을 누구에게 돌리느냐도 갈립니다. 『산양공재기』라는 책은 이 이른 시기 기록으로는 드물게 화공의 공을 주로 유비에게 돌립니다.

소설 『삼국지연의』는 사정이 또 다릅니다. 핵심은 흔히 14세기 후반의 나관중이 지은 것으로 보지만, 1522년에 『삼국지통속연의』가 나왔고 17세기 중반 모종강이 다듬은 판이 오늘날 본문의 바탕입니다. 여러 판본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것도 장회를 120회로 정비한 이 모종강본입니다. 적벽 이야기는 그 가운데 43~50회, 소설의 한가운데를 차지합니다.

사건에서 천 년도 더 지나 꼴을 갖춘 이 소설은 유비와 제갈량, 촉한에 크게 우호적입니다. 기록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연합군의 주력은 주유와 정보가 이끈 손권 쪽이었고, 결정적 행동은 황개의 화선이었으며, 조조군의 질병이 패배에 꽤 큰 몫을 했습니다. 소설은 이 무대의 한가운데에 제갈량을 세웁니다.

여섯 장면을 소설과 기록으로 나눈 비교표. 손권 설득: 소설에서는 제갈량이 손권의 신하들을 말로 이김, 기록에서는 주유 쪽과 제갈량 쪽 두 기록이 엇갈림. 짚단 배로 화살 얻기: 소설에서는 제갈량의 꾀, 기록에서는 가까운 시대의 뒷받침이 없고 더 이른 이야기는 주유의 꾀로 돌림. 동남풍: 소설에서는 제갈량이 술법으로 부름, 기록 쪽 설명으로는 겨울에 북서풍이 많지만 남풍·동풍도 붊. 장간과 가짜 편지: 소설에서는 조조가 장수 둘을 죽임, 기록에서는 『삼국지』에 없고 한 연대기는 장간의 방문을 209년에 둠. 배 묶기: 소설에서는 방통이 조조에게 배를 사슬로 묶게 함, 기록에서는 배가 이물과 고물을 맞대고 정박했다고 하며 방통전에는 그가 적벽에 있었다는 말이 없음. 화용도: 소설에서는 관우가 조조를 붙잡았다가 놓아줌, 기록에서는 화용으로 가는 길의 힘든 퇴각 이야기가 있음
기록과 소설에서 갈리는 여섯 장면. 기록 쪽 칸은 드 크레스피니의 정리를 줄인 것입니다 (도표)(도표)

이야기에서는 제갈량이 짚단을 실은 배를 조조 진영 앞에 띄워 적의 화살을 거두어 오고, 술법으로 동남풍을 부릅니다. 기록에서는 두 이야기 모두 가까운 시대의 뒷받침이 없고, 거의 완전한 허구로 보입니다. 오히려 더 이른 이야기책인 『삼국지평화』는 짚단 배 꾀를 주유에게 돌립니다.

짚단 배 이야기의 씨앗으로 보이는 일화는 따로 있습니다. 『위략』에 따르면 213년 유수에서 손권이 배를 타고 형세를 살피다 한쪽에 화살이 잔뜩 박혀 배가 기울었습니다. 손권은 배를 돌려 반대쪽으로도 화살을 맞아 균형을 잡고 돌아왔습니다. 드 크레스피니는 부풀려졌을 이 일화가 뒤에 제갈량의 꾀로 옮겨 갔을 것으로 봅니다.

이야기에서는 조조가 보낸 장간이 주유의 진영에 왔다가 가짜 편지를 훔쳐 가고, 조조는 그 편지 때문에 채모와 장윤을 죽입니다. 방통은 조조에게 배를 서로 사슬로 묶게 합니다. 기록에서는 둘 다 『삼국지』에 나오지 않습니다. 방통의 전기에는 그가 적벽에 있었다는 말조차 없고, 『자치통감』은 장간의 방문을 적벽 뒤인 209년에 둡니다.

화용도에서 관우가 조조를 붙잡았다가 예전 은혜를 생각해 놓아주는 장면도 소설과 전통극의 이야기입니다. 주유의 모습도 소설에서 크게 바뀌었습니다. 재주는 있으나 제갈량에게 번번이 지고 좌절해 시기하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그렇다고 "기록은 진실, 소설은 거짓"으로 깔끔하게 나뉘지도 않습니다. 기록 안에서도 주유 쪽과 제갈량 쪽의 이야기가 엇갈리고, 배송지가 모은 자료에도 허구가 섞여 있습니다. 드 크레스피니는 『삼국지』의 역사가 소설과 다를 때도 참과 거짓의 대비라기보다 또 하나의 이야기처럼 다를 때가 많다고 했습니다.

전투가 남긴 것

적벽 전투는 건안 13년 겨울, 아마 서력 208년 말쯤의 일입니다. 조조에게 꼭 큰 전술적 패배는 아니었습니다. 조조는 비교적 질서 있게 물러났고, 강릉에서 한수 골짜기로 이어지는 형주 북부는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을 빨리 꺾겠다는 희망은 무너졌고, 그의 군대는 다시는 그렇게 남쪽까지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다음 해 주유의 군대가 강릉을 차지했고, 주유는 210년에 죽었습니다. 유비는 형주 남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돌아보면 적벽 원정은 그 뒤 오랫동안 제국을 다시 하나로 합칠 마지막 기회였던 셈입니다. 유비와 손권이 독립을 이어 가면서 삼국의 긴 분열이 굳어졌습니다.

이 싸움은 한국에서도 오래 읽혔습니다. 『삼국지연의』는 『조선왕조실록』 1569년(선조 2) 기사로 보아 16세기 무렵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여겨지고, 지금까지 확인된 번역본과 필사본 같은 이본만 200여 종입니다. 연의의 적벽대전 부분을 떼어 낸 고전소설 『화용도』는 판소리 「적벽가」와 내용이 같고,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 여섯 마당 가운데 하나를 이룹니다.

『화용도』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많은 독자를 얻었습니다. 2008년과 2009년에는 오우삼 감독의 두 편짜리 영화 「적벽」이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적벽은 대개 이 이야기 속 적벽입니다.

기록 속 적벽은 그보다 조용합니다. 바람을 부르는 술법 대신 지친 군대와 진중의 병, 겨울에도 가끔 부는 남풍이나 동풍, 그리고 불을 실은 배 한 무리가 있습니다. 두 적벽을 나란히 놓고 읽으면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자랐는지가 보입니다.

다음에 읽을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