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남부를 남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드는 강이 있습니다. 오늘날 청천강이라 부르는 이 강이 옛 기록의 살수(薩水)입니다. 612년 7월, 물러나던 수나라 군대가 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뒤에서 고구려군이 들이쳤습니다.
을지문덕과 살수대첩은 많은 사람이 아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을 이야기할 때 자주 붙는 "백만 대군"의 백만은 어느 기록의 숫자이고, 누구를 센 것일까요?
이 글은 598년부터 614년까지 이어진 고구려와 수의 전쟁을 따라가면서 그 숫자들을 하나씩 읽어 봅니다. 길잡이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들입니다. 항목마다 쓴 연구자가 달라서, 같은 전쟁인데도 숫자가 조금씩 다릅니다.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무엇이 달라졌나
581년에 세워진 수나라는 북쪽의 돌궐을 격파하고, 589년에 남쪽의 진(陳)을 멸망시켰습니다. 300여 년 동안 갈라져 있던 중국이 다시 한 왕조 아래 묶였습니다.
그 전까지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에 자기 세력권을 두고 있었습니다. 「여수전쟁」 항목을 쓴 노태돈은 고구려와 중국 왕조가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며 공존했다고 설명합니다. 통일한 수는 이 세력권을 부정하고 복속을 요구했습니다. 고구려 아래에 있던 거란족과 말갈족 일부도 수 쪽으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고구려는 진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전쟁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영양왕은 두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즉위하면서 수 문제(文帝)에게서 상개부의동삼사라는 벼슬과 요동군공 작위를 받았고, 조공으로 외교 관계를 이어 가려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국경 수비를 강화하고 말갈·거란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며 돌궐과 손잡을 길도 찾았습니다.
수에 복속할 것인가, 자기 세력권을 지키려 싸울 것인가. 고구려는 싸우는 쪽을 택했습니다.
598년, 첫 원정
첫 충돌은 598년에 일어났습니다. 고구려가 요서(遼西) 지방에 있던 수의 전진 기지를 먼저 공격했고, 「영양왕」 항목은 이때 왕이 말갈의 군사를 이끌었다고 적습니다.
수 문제는 30만 군대로 바다와 육지 두 길을 따라 고구려에 쳐들어왔습니다. 원정은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물러난 까닭은 항목마다 설명이 다릅니다. 「여수전쟁」은 고구려군의 반격과 질병 등으로 패배해 퇴각했다고 쓰고, 「영양왕」은 기근·질병·장마 등으로 스스로 퇴각했다고 씁니다. 질병은 두 설명에 다 있지만, 고구려군의 반격이 얼마나 컸는지는 서로 다르게 봅니다.
612년, 기록에 남은 113만
문제에 이어 양제(煬帝)가 다시 고구려 침공을 꾀했습니다. 고구려는 돌궐과 손잡아 수의 북쪽 국경을 흔들려 했지만, 돌궐은 이미 수에 복속된 뒤라 효과가 없었습니다.
612년 정월, 양제는 육군 113만과 해군 4만을 직접 이끌고 나섰습니다. 보급 물자를 나르는 데 동원된 사람은 전투병의 두 배에 이르렀습니다. 「여수전쟁」 항목은 이것을 그때까지 세계 역사에서 동원된 병력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고 평가합니다.
육군은 40개 부대로 나뉘었고, 부대 하나를 군(軍)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가운데 9개 군을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 등이 지휘했습니다. 9군의 병력은 30만 5천 명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충돌은 3월에 요하(遼河)에서 시작됐습니다. 고구려는 강을 사이에 두고 수 군대가 건너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수 군대는 4월 중순에야 강을 건넜고, 그때부터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의 여러 성이 성을 지키는 싸움, 곧 수성전(守城戰)에 들어갔습니다.
고구려는 들판에서 큰 정면승부를 벌이지 않았습니다. 들판의 물자를 태운 뒤 주요 성을 지켜 적이 나아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작은 부대로 적을 흔들고, 길게 늘어진 보급선을 끊었습니다. 전쟁은 길어졌습니다.
추운 계절이 다가오자 양제는 중간의 성들을 남겨 두고 정예 30만이 곧바로 평양성을 치게 했습니다. 평양성에 닿으면 바다를 건너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수의 해군과 합쳐 도성을 공략할 계획이었습니다.
살수로 가는 길
「살수대첩」 항목에 따르면 9군은 처음 출발할 때 사람과 말 모두 100일치 식량을 받았고, 무기와 군수물자까지 더해 병사 한 사람이 진 짐이 3섬이 넘었습니다. 버리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는데도 장수와 병졸 모두 장막 아래 구덩이를 파고 식량을 묻었습니다. 행군이 중간쯤 왔을 때 벌써 식량이 떨어질 지경이었습니다.
압록강 서쪽에 모인 이 군대를 상대한 사람이 을지문덕(乙支文德)입니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 수 군영으로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며 안의 사정을 살폈습니다. 「을지문덕」 항목은 그가 이때 수 군대의 군량이 모자란다는 것을 알아챘다고 씁니다. 돌아온 뒤 그는 우중문이 뽑아 보낸 기병과 싸울 때마다 일부러 지고 물러났습니다.
그 무렵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짧은 시를 보냈습니다. 『삼국사기』 을지문덕전에 지은 경위가 적혀 있고, 제목은 뒤에 붙었습니다. 「유우중문」 항목의 번역은 이렇습니다.
> "신기한 계책은 천문을 헤고 교묘한 계산은 지리를 꿰뚫었네. 싸움에 이겨 공이 하마 높았으니 만족하고 이만 그쳐 주게나"
우중문은 편지를 보내 달랬지만 을지문덕은 거절했습니다. 수 지휘부의 의견은 갈렸습니다. 우문술은 양식이 모자라니 돌아가자고 했고, 우중문은 쫓아가 공을 세우자는 쪽이었습니다. 양제에게서 더 큰 권한을 받은 우중문의 뜻이 받아들여졌고, 9군은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내려왔습니다.
9군은 바다로 온 내호아(來護兒)의 수군과 만나 식량을 받을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호아의 수군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 어귀로 들어와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포구에 머물렀고, 주된 일은 식량 운송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군의 거짓 패배에 자신감을 얻어 자기 부대만으로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크게 졌습니다. 9군은 결국 이 수군과 합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을지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했습니다. 군대를 돌리면 영양왕을 모시고 가서 양제를 뵙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돌아갈 명분이 생긴 셈입니다. 9군은 회군을 정했고, 고구려군은 곧 뒤를 쫓았습니다.
「살수대첩」 항목에 적힌 날짜로 7월 24일, 9군이 살수에 닿았습니다. 고구려군은 수 군대가 강을 반쯤 건넜을 때 뒤쪽의 후군부터 공격했습니다. 수의 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이 싸움에서 죽었습니다. 기록에는 수의 장졸이 만 하루 만에 압록강까지 달아났다고 적혀 있습니다.
9군이 무너지자 포구에 갇혀 있던 내호아의 부대도 물러났습니다. 양제 역시 패배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돌렸습니다. 「살수대첩」 항목을 쓴 이정빈은 살수 전투를 612년 전쟁의 결정적 전투로 봅니다.
성벽과 공성 도구
요동성은 요동의 물가에서 가장 험하고 단단했던 고구려의 요새입니다. 612년과 613년에 수 군대는 비루(飛樓)·동차(橦車)·운제(雲梯)·지도(地導) 같은 도구로 공격했지만 성을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도구 이름에는 공격하는 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동차는 바퀴 달린 큰 궤 속에 사람이 들어가 쇠뭉치 같은 것으로 성벽 밑을 쳐서 부수는 수레입니다. 운제는 성을 공격할 때 쓰던 높은 사다리이고, 지도는 성 가까이 굴을 파고 들어가는 공격입니다.
막는 쪽의 모습은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1953년 평안남도 순천군 용봉리에서 발견된 요동성총이라는 무덤에 요동성의 성곽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성벽마다 여러 모양의 여장(女墻)이 있고, 몸을 숨긴 채 구멍으로 화살 등을 쏘는 사혈(射穴)도 보입니다. 문에는 문루가, 성 모서리에는 각루가 서 있습니다.
고구려 성의 대부분은 산성이었습니다. 뒤에 높은 봉우리를 두고, 계곡을 품은 채 좌우 능선을 따라 평지까지 성벽을 내려 쌓았습니다. 그러면 성 안에 사람이 머물 공간과 물이 생깁니다. 모양이 안락의자를 닮았습니다.
실제 크기는 의자 하나로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제각각이었습니다. 둘레가 100~200 m에 그치는 보루성부터 10 km가 넘는 큰 산성까지 있었습니다. 성벽 아랫부분은 들여쌓기로 쌓았고, 치(雉)와 옹성(甕城)을 갖춘 곳도 있었습니다.
성은 행정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욕살·처려근지 같은 지방관은 군사와 행정을 함께 맡았고, 그 관청이 산성 안에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지방 제도와 군사 제도가 이렇게 맞물려 있었습니다.
전쟁 전체를 멀리서 보면 이렇습니다. 수는 바다와 육지로 대군을 보내 단숨에 고구려를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고구려는 성을 중심으로 버티면서 수의 긴 보급선을 흔들고, 가을이 와서 적이 추위와 보급 부족에 시달리기를 기다렸습니다.
숫자를 어떻게 읽을까
같은 612년 원정인데 항목마다 숫자가 다릅니다. 「여수전쟁」과 「살수대첩」은 113만, 「영양왕」은 130만이라고 쓰고, 「을지문덕」은 100만이 넘는다고만 합니다. "백만 대군"이라는 말을 들으면 먼저 이 가운데 어느 숫자인지, 무엇을 센 것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 백과 항목 | 612년 동원 규모 | 평양으로 보낸 별동대 | 살아 돌아간 사람 |
|---|---|---|---|
| 「여수전쟁」 | 육군 113만, 해군 4만, 보급 인원은 전투병의 두 배 | 정예 30만 | 수천 명 정도 |
| 「살수대첩」 | 113만, 육군은 40개 군 | 9군 30만 5천 명 | 2,700명 |
| 「영양왕」 | 130만 | 숫자 없음 | 숫자 없음 |
| 「을지문덕」 | 100만이 넘는 군단 | 30만 5,000명 | 2,700명 |
「여수전쟁」의 113만은 육군입니다. 해군 4만이 따로 있고, 짐을 나른 사람은 전투병의 두 배였다고 하니, 이 항목대로라면 원정에 동원된 사람 전체는 113만보다 훨씬 많습니다. 살수에서 무너진 것은 이 가운데 9군, 30만 5천 명이었습니다.
살아 돌아간 사람은 「살수대첩」과 「을지문덕」이 2,700명, 「여수전쟁」이 수천 명 정도라고 씁니다. 2,700명이라면 100명에 한 명꼴도 안 됩니다. 그 숫자 뒤에는 100일치 짐을 지고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쟁을 몇 번째로 세는지도 다릅니다. 「영양왕」은 598년부터 네 차례로 세어 612년을 2차라 부르고, 「요동성」은 612년과 613년을 1·2차 침입이라 부릅니다. 같은 "2차"가 다른 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을지문덕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록도 많지 않습니다. 『삼국사기』 을지문덕전은 그의 집안 내력을 알 수 없다고 했고, 『자치통감』에는 위지문덕이라는 이름으로도 나옵니다. 조선 후기 책이 그의 출신지를 적었지만 「을지문덕」 항목은 후대 기록이라 사실 여부가 불확실하다고 봅니다. 성 '을지'를 두고도 여러 견해가 갈려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백과 항목에는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다"는 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여수전쟁」은 참고문헌으로 『삼국사기』, 『수서』,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의 『고구려대수당전쟁사』(1991)를 듭니다. 숫자를 옮길 때 어느 항목, 어느 사서의 숫자인지 함께 적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613년과 614년, 그리고 수의 끝
613년 4월, 양제가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이번에도 수 군대는 요동성과 신성 일대에서 막혔습니다. 그러던 중 군수물자 조달을 총괄하던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켜 수 군대는 급히 물러났고, 물러나는 군대를 친 고구려군이 크게 이겼습니다.
614년에도 원정이 있었습니다. 거듭된 패배로 사람과 물자를 크게 잃은 수의 농민들이 각지에서 봉기해 군대를 모으기도 어려웠습니다. 고구려도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이루어져 수 군대가 물러났습니다.
615년에도 원정 계획이 있었지만 전국의 반란과 강해진 돌궐의 위협 속에 취소됐습니다. 618년 양제가 피살되면서 수는 사실상 멸망했습니다. 수나라 말기 민중 사이에는 "요동에 가서 헛되이 죽지 마라"라는 노래가 널리 퍼졌습니다.
노태돈은 「여수전쟁」에서 고구려 원정 실패를 수 멸망의 결정적 원인으로 꼽고, 「고구려」에서는 거듭된 패배와 전쟁의 고통, 재정 파탄을 주요 원인으로 듭니다. 수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기도 했던 백제와 신라는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한발 물러나 지켜보았습니다. 고구려는 독자적인 세력을 지켰지만 커다란 타격을 받았고, 반도 안 삼국의 전쟁은 계속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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