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년 여름, 요동의 한 산성을 당나라 황제의 대군이 에워쌌습니다. 앞서 요동성과 백암성이 차례로 무너졌고, 성을 구하러 온 고구려 대군도 성 가까이에서 졌습니다. 그런데 이 성은 석 달 가까이 버텼고, 황제는 끝내 군대를 돌렸습니다.
안시성 이야기입니다. "성 하나가 전쟁을 막았다"는 말은 어디까지가 기록이고 어디부터가 뒷날의 이야기일까요? 이 글은 644년부터 668년까지 이어진 고구려-당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645년 원정과 안시성 공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리고 고구려가 그 뒤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삼국사기』 역주본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으로 따라갑니다.
왜 전쟁이 일어났나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닙니다. 당이 세워진 뒤 두 나라는 사신을 주고받았고, 622년에는 고구려-수 전쟁 때 잡힌 포로를 서로 돌려보냈습니다. "여당전쟁" 항목은 이 전쟁의 근본 원인을 통일된 중국 세력의 팽창 정책에서 찾습니다.
긴장은 조금씩 쌓였습니다. 631년 당은 요서 지역에 있던 경관을 헐었습니다. 경관은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을 기념해 세운 승전 기념물이었습니다. 같은 해 고구려는 부여성에서 요동반도 남쪽 끝까지 이어지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해 16년에 걸쳐 완성했습니다.
장성 공사를 감독한 사람이 연개소문입니다. 642년 그는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반대파를 없애고 보장왕을 세운 뒤 실권을 잡았습니다. 둘이 왜 부딪쳤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학계에서는 영류왕의 온건한 대당 노선에 대한 반발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남쪽에서도 일이 꼬였습니다. 백제와의 싸움에서 밀리던 신라가 김춘추를 평양에 보내 관계를 고쳐 보자고 했지만, 연개소문은 거절했습니다. 고립될 처지가 된 신라는 당에 더 가까이 붙었습니다. 고구려가 당의 사신을 붙잡아 두면서 긴장은 끝까지 치달았고, 644년 당군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645년 봄, 요하를 건너다
645년 3월, 당 태종은 지금의 허베이성 중부인 정주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원정의 뜻을 밝혔습니다. 수나라가 네 차례 군사를 내고도 얻지 못한 곳이라는 것, 중국을 위해서는 자제의 원수를 갚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이 왕과 대신들을 죽였으니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말도 구실로 내세웠습니다. 태종은 반대 여론이 적지 않았는데도 침공을 결심했고, 군량과 배, 성을 칠 기구를 미리 마련했습니다.
4월 1일, 이세적이 이끄는 선봉은 회원진 쪽으로 가는 척하다가 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넜습니다. 고구려의 성읍들은 크게 놀라 모두 문을 닫고 지켰습니다. 당군은 신성과 건안성 등 여러 성을 한꺼번에 쳐서 방어를 흐트러뜨리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병력을 모아 개모성을 쳤습니다.
그 뒤 두 달이 채 안 되는 사이 요동의 큰 성들이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개모성은 4월 26일, 장량의 수군이 요동반도에 올라 공격한 비사성은 5월 2일에 함락되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비사성이 무너지며 남녀 8,000명을 빼앗겼다고 적혀 있습니다. 태종이 직접 합류한 요동성은 19일 동안의 공격 끝에 5월 17일, 백암성은 6월 10일에 당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황제의 군대도 쉽게 온 것은 아닙니다. 요하 서쪽의 늪지인 요택에는 진흙이 200여 리나 이어져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없었습니다. 당군은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들고서야 이곳을 건넜습니다. 돌아갈 때도 이 늪을 다시 지나야 했습니다.
안시성 88일
6월 20일, 당군이 안시성에 이르렀습니다. 고구려는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에게 고구려와 말갈 군사 15만 명을 주어 성을 구하게 했습니다. 욕살은 6~7세기 고구려에서 왕도와 지방의 행정을 맡으면서 군대도 이끈 장관이었습니다.
고구려 지휘부 안에서는 두 방책이 맞섰습니다. 노련한 장군들은 주요 성을 굳게 지켜 적의 진격을 막고, 적이 현지에서 식량을 구하지 못하게 하는 전통적인 청야수성책을 주장했습니다. 다른 쪽은 요동 평원에서 정면으로 크게 싸우자고 했고, 지휘부는 이쪽을 골랐습니다.
구원군은 안시성 동남쪽, 성에서 8리쯤 되는 곳에서 당군의 포위망에 빠져 크게 졌습니다. "안시성전투" 항목에는 고연수와 고혜진이 살아남은 3만 6,800명과 함께 항복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고연수" 항목은 그가 3만여 군사를 잃고 항복했다고 적어, 숫자의 뜻부터 엇갈립니다. 이 무렵 고구려는 남쪽에서 신라의 공격도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안시성은 홀로 남았습니다. 당 쪽에서는 백암성을 이긴 뒤부터 이 성을 어떻게 할지 말이 갈렸습니다. 태종은 안시성이 험하고 병력이 정예하며, 성주가 연개소문의 공격에도 굴복하지 않아 연개소문이 결국 성을 그에게 맡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병력이 약하고 양식이 적은 건안성을 먼저 치자고 했습니다.
이세적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건안성은 남쪽, 안시성은 북쪽에 있고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으니, 안시성을 건너뛰었다가 보급로가 끊기면 어쩌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태종은 장수로 삼은 그의 계책을 따랐고, 이세적이 안시성을 쳤습니다.
공격이 막히자 다른 길도 거론되었습니다. 항복한 고연수는 안시성을 그냥 두고 방비가 약한 오골성을 차지한 뒤 곧장 평양으로 가자고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천자가 몸소 나온 싸움에서 안시성을 뒤에 두고 나아가는 모험은 할 수 없다는 반대가 나왔고, 공격은 계속되었습니다. "고연수" 항목은 그 반대를 낸 사람을 장손무기로 적었습니다.
당군은 당시 가장 위력적인 성 공격 무기였던 포거와 충거를 끌고 왔습니다. 포거는 큰 돌을 날려 보내는 투석기이고, 충거는 성벽을 들이받아 부수는 수레입니다. 안시성은 이 공격을 번번이 물리쳤고 무너진 성벽은 재빨리 고쳤습니다. 이세적은 하루에도 여섯일곱 번씩 성의 서쪽을 쳤습니다.
그다음 당군은 흙으로 산을 쌓았습니다. 60일에 걸쳐 연인원 50만 명을 들여 성의 동남쪽에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올렸고,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했습니다. 성 안의 고구려군도 성벽을 더 높여 맞섰습니다.
그런데 토산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성벽 한쪽 귀퉁이가 부서졌습니다. 고구려군이 토산 밑으로 땅굴을 파서 무너뜨렸으리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고구려군은 무너진 성벽 사이로 나가 토산을 차지했고, 당군은 사흘 동안 거세게 공격했지만 되찾지 못했습니다. 부서진 성벽 자리에는 나무 울타리인 목책을 세웠습니다.
계절은 당군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겨울이 다가와 날이 추워지고 군량도 떨어지자, 당군은 88일 동안의 포위를 풀고 9월 18일 서둘러 물러났습니다. "여당전쟁" 항목은 진격이 늦어지는 사이 긴 보급선과 후방이 위협받고 있었다는 점도 듭니다. 10월, 요택 한가운데의 물을 건널 때는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 젖어 죽은 병사가 많았습니다.
산성과 공성 무기
안시성은 산 위에 쌓은 산성이었습니다. 고구려는 요하 유역을 따라 신성, 요동성, 건안성, 개모성, 백암성, 비사성 같은 방어성을 두었고, 그 가운데 안시성의 전략적 비중은 요동성 다음이었습니다. 신성과 건안성 사이에 자리해서, 다른 성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면 이 성의 방어가 요동 여러 성의 방어에 곧바로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성을 치는 쪽이 쓴 도구는 셋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큰 돌을 날려 보내는 포거, 성벽을 부수려고 들이받는 충거, 그리고 성벽보다 높게 쌓아 발판으로 삼는 토산입니다. 앞의 둘은 성벽을 깨뜨리려는 도구이고, 토산은 성벽보다 높은 자리에서 성을 치려는 공사였습니다.
지키는 쪽은 깨진 곳을 빨리 메웠습니다. 성벽이 무너지면 고치고, 토산이 높아지면 성벽을 더 올리고, 그래도 뚫린 곳에는 목책을 세웠습니다. "안시성" 항목은 이 공방이 당시 고구려 산성들의 방어력이 강했음을 말해 준다고 봅니다.
청야수성책은 계절을 편으로 삼는 방어였습니다. 성을 지켜 적의 진격을 막고, 적이 현지에서 식량을 구하지 못하게 한 뒤, 따로 움직이는 부대로 긴 보급선을 끊고 기습으로 흔듭니다. 가을이 되면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적이 물러날 수밖에 없으니 그때 친다는 계산입니다. 645년의 구원군은 이 방책 대신 회전을 골랐다가 졌지만, 안시성에서 당군이 막힌 뒤 고구려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해 이 방식으로 당군을 압박했습니다.
기록과 뒷날의 이야기
645년의 결과를 두고 기록끼리 무게가 다릅니다. 중국 측 문헌에는 당군이 10개 성을 빼앗고 고구려군 4만 명 이상을 죽였으며, 당군 전사자는 2,000명뿐이었다고 큰 전과처럼 적혀 있습니다. "안시성전투" 항목은 태종이 안시성에서 물러난 지 3일 만에 서둘러 요수를 건넌 일과 철군 뒤 침공을 몹시 후회한 일을 들어, 당의 타격이 기록보다 훨씬 컸으리라고 추측합니다.
태종 자신도 이 원정을 편하게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2월 그는 장수 이정에게, 천하의 군대를 이끌고도 곤경을 겪은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고구려 쪽 사정도 자료마다 다르게 그려집니다. 설연타와 손잡으려던 외교를 "안시성전투" 항목은 실패로 적고, "여당전쟁" 항목은 고구려가 설연타에 사절을 보내 당의 북쪽 국경을 치게 했다고 적습니다.
『삼국사기』의 645년 기사에는 같은 내용이 중국 사서 『자치통감』에도 있다는 역주가 기사마다 붙어 있습니다. 이 책을 엮은 김부식은 사론에서 당 태종을 보기 드문 군주로 평가한 뒤, 동방 원정이 안시성에서 무너졌으니 그 성주는 호걸로 비범한 인물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역사서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 것을 매우 애석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주는 흔히 "양만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만춘" 항목에 따르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고려 이전 자료에도, 송·원 이전의 중국 자료에도 성주의 이름은 없습니다.
이 이름이 처음 보이는 것은 명나라 웅종곡이 쓴 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이고, 지금 전하는 가장 이른 간행본은 1553년 판입니다. 그 소설에 나오는 안시성의 장수 여섯은 소설 속에서 지어낸 인물이었고, 이름은 임진왜란 무렵 명과 교류하며 조선에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당 태종이 이 싸움에서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려 후기의 문헌을 통해 전해진 것입니다.
성의 자리도 오래 논란이었습니다. 17세기 이후 중국을 오가던 조선 사신들 사이에서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보는 견해가 생겼습니다. 지금은 랴오닝성 하이청시 동남쪽의 영성자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고, 다스차오시의 해룡천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 뒤 23년: 고구려가 무너지기까지
단번에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어렵다고 본 당은 전략을 바꿨습니다. 작은 육군·수군 부대로 고구려를 기습하고 물러나기를 되풀이해, 고구려가 농사를 편히 짓지 못하게 하는 장기 소모전이었습니다. 두 나라의 인구와 생산력 차이가 컸기 때문에 이 소모전은 고구려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당 고종은 고구려 남쪽에 두 번째 전선을 세우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입니다. 이듬해 661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성을 포위하고 몇 달 동안 공격했습니다.
이 작전은 645년과 달랐습니다. 신라가 식량 같은 보급을 도와주자 당군의 가장 큰 어려움이 풀렸고, 겨울에도 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구려는 신라군에 맞서느라 방어력을 둘로 나눠야 했습니다.
마지막 타격은 안에서 왔습니다.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밀려난 남생은 국내성으로 가서 아들을 보내 당에 투항했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12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했습니다. 신성과 부여성이 함락된 데 이어 668년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했고, 보장왕은 당으로 끌려갔습니다.
안시성의 이야기는 그 뒤에도 조금 더 이어집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이 성은 요동 지역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671년 7월 당군에 함락되었습니다. 645년에 88일을 버틴 성이 무너진 것은 나라가 사라진 지 3년 뒤였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고구려-수 전쟁과 살수대첩: 백만 대군 기록 읽기. 당보다 먼저 고구려를 친 수나라의 원정과, 옛 기록 속 큰 숫자를 읽는 법을 이어서 볼 수 있습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안시성 앞에서 이세적이 걱정한 보급로 문제를 오늘날 군대는 어떤 말로 다루는지 봅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성벽과 투석기의 시대에서 한참 뒤, 새 무기가 자리를 잡기까지 걸린 시간을 다른 시대에서 봅니다.